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남학생들의 졸업방식

@19-3.jpg

상상력에 대해 상상해 보자. 타인과 접속되는 방식에 대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내일이라는 낯선 시공간에 대해 상상하는 방식이 기술의 발전만큼 빠른 속도로 진전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진정 감당하기 힘든, 빠져나올 수 없는 카오스의 소용돌이가 돼 버릴까. 상상력의 진화가 가져올 혼란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기술의 발전만으로도 질릴 만큼 충분히 진화의 느낌을 만끽할 수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거의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완강하게 낡은 상상력의 구도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최근 들어 기술과 함께 발빠른 스윙댄스를 추고자 하는 재현물들은 사실 전혀 가볍지 않다. 흥겹지도 발랄하지도 않다. 그 어떤 비밀스런 내적 리듬도 감추고 있지 않다. 그저 옛 멜로디를, 동일한 몸동작을 지겹도록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다.

이 영화의 원제인 ‘이 투 마마 탐비엔 (Y tu mama tambien)’은 ‘나 역시 너네 엄마랑 그 짓 했다’는 뜻이다. 이 무슨 뻔한 허풍인가? 투박한 ‘앙띠-오이디푸스’ 선언에 성급함을 느끼며 오이디푸스 삼각 구도가 개인의 내적 성장에 끼치는 영향력을 인정해 주고자 하는 사람도 이쯤 되면 위의 통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두 명의 고교 남학생이 애인 없는 여름방학의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연상의 ‘여인’과 무작정 길을 떠난다. 그리고 돌아온 이후 ‘무사히’ - 즉 ‘예정된 대로’ - 대학생이, 사회인이 된다. 그렇고 그런 또 한편의 남성성장영화. 영화 <이투마마>가 오이디푸스 삼각구도를 알리바이로 삼아 소프트 포르노를 전개시키는 양상은 영화가 주장하는 몇몇 심각한 ‘정치적 혹은 리얼리즘적’ 이유들과 무관하게 따분하고 유치하다.

전지적 시점의 화자가 등장해 그들의 행위와 멕시코 현실의 실상을 오프 보이스로 코멘트한다고 해서, 두 소년이 서로 다른 계급출신이라고 해서, 차창 밖으로 검열과 데모와 자본 합리주의에 밀려나는 선량한 서민의 모습이 계속 스쳐 지나간다고 해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장치 역시 그저 오이디푸스 삼각구도 못지 않게 옹색한 알리바이일 뿐. 멕시코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두 고교생과 한 ‘성숙한 여인’의, 그것도 죽음을 앞둔 여인의 육체가 필요했다면 그건 지나친 과장이다. 섹스 코미디와 현실비판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다면 좀 더 치열한 고민을 투자해야 했을 것이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통과해 시민사회에 입성하는 소년들의 성장이라는 틀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신화라서 웬만한 변형없이는 그 자동 기술적 효과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뻔하고 식상하지만 위력을 발휘하는 것, 그게 신화의 속성 아니던가. 신화의 위력을 깨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을 퍼 올려야 한다. (예컨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책 읽어주는 남자>처럼)

‘농익은’ 여성의 육체가 성인식을 앞둔 소년들의 은밀한 ‘개인교사’ 역할을 수행한다는 발상은 발랄한 여/남 관계의 개화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소년들이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개발할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시켜 버린다. <이 투 마마>처럼 교사역할을 하는 여성이 소년들의 설익은 마초 성향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성숙한’ 위치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남학생들의 졸업, 이제 그 형식과 내용을 제발 좀 바꿔보면 안될까.

김영옥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