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들의 비판적 성찰 필요한 시기

글쓴이:정경자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여성운동 단체에서 일했다. 호주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즈 대학에서 급변하는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를 호주와 한국의 두 여성운동 조직을 통해 비교연구했다. 지금은 같은 대학에서 사회정책 조사방법론을 가르치고 있다. <편집자주>

여성운동이 변하고 있다. 아니 변해버렸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성운동이 놓여 있는 여건의 변화에 따라, 또한 여성활동가들의 면면이 바뀜에 따라 여성운동 또한 변화를 거듭해 왔다.

우리의 경우 김영삼 정부 집권이후, 더 나아가 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여성운동이 좋은 시절을 만났다. 여성운동 단체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이 늘어났고 보다 지속적이고 안정된 활동을 펼쳐갈 최소한의 기반이 마련됐다. 각종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 줄 법들이 마련되고 성폭력 가정폭력 등을 호소할 기관들이 대폭 증설됐다.

뿐인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여성부가 설립됐고 적지 않은 수의 전직 여성활동가들이 주요한 공직에 진출해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관료가 됐다. 물론 오늘의 이러한 결과들이 그 동안 여성운동과 활동가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실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과연 여성운동은 르네상스인가.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여성운동단체를 방문하고 행사에 참여했다. 또 과거 동료들을 만나 여성운동 판의 속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운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활동가들은 괴로워하고 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쥐꼬리만한 활동비에도 불구하고 여성운동의 이념 때문에 여성운동에 헌신하고자 그곳에서 활동한다. 살아남기 위해, 아니 다른 운동단체를 누르고 확장 팽창하고 더 많은 프로젝트들을 따내야하므로 운동성 있는 사업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프로젝트를 따기 위한 일회적 전시적 행사를 치러내느라 밤이면 밤마다 야근이다.

운동권으로서 가져야 할 비판의 기능은 제도권과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약화돼 버렸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찾아 바쁘게 뛰어야 할 활동가들이 재정보고서 작성이 주 업무가 돼버리기도 한다. 또한 평등, 민주, 보살핌, 자매애 등의 여성주의 조직원리들은 조직이 양적으로 팽창함에 따라 효율성의 원리에 밀려나 버리고 있다. 활동가들은 힘들다, 지쳤다, 피곤하다고 호소한다.

이것이 과연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기를 살려주는 운동판의 모습인가. 여성운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여성운동이라고 믿으며 활동하는가.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모든 사회제도와 실천들은 비판적인 성찰을 통해 변화 발전해 왔다. 여성운동도 예외일 순 없다. 우리 사회는 여성주의 시각에서의 성찰이, 비판이, 평가가 여전히 필요하다.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먼저 여성주의 원칙들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왜 여성운동을 하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리고 어떤 전략으로 그 목표들을 달성해 나가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운동가들이 모여서 토론해야 한다. 여성운동을 이끌고 구성해 나갈 중심은 바로 활동가들이다. 따라서 활동가들의 여성의식 고양노력 또한 필수적이다.

또한 정부의 재정지원의 한계를 미리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부 재정 지원이 여성운동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이미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즉, 운동성이나 급진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또한 조직의 측면에서는 위계화·관료화되는 경향이 높으며 주로 상담이나 쉼터와 같은 서비스에 재정지원이 집중된다. 일례로 내가 연구했던 호주 한 여성운동 단체의 경우 99%의 재정을 정부에 의존해 왔다. 활동의 증가로 예산증가가 불가피해 거리시위, 탄원서, 로비활동을 통해 재정증액을 요구했으나 관련 정부단체에서는 두 명의 감사관을 파견해 그 동안의 활동을 면밀히 검토했고 증액요구는 거절됐다. 결국 24시간 상담업무를 유지하기 위해 유일한 한 명의 운동부 간사가 해고됐고 70∼80년대 호주의 가장 급진적인 여성단체였던 이곳은 이제 그저 여성주의 상담기관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20년 뒤의 우리 운동의 모습일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끝으로 이 변화된 시대에 여성운동의 급진성을 담보하기 위해 예리한 칼날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성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관심을 늘 기울여야 한다. 그 여성들 옆에 서서 문제의 해결을 도와주고 힘을 줄 때 여성들은 여성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한다. 이런 여성대중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이 운동성의 뿌리임을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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