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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EMINEM KOREA>

에미넴의 음악을 즐겨듣는다고?

너는 에미넴의 노래를 좋아한다 했지. 그래, 그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 어쨌든 에미넴은 인기정상의 가수잖아. 검색엔진에 이름을 넣으면 한국의 팬사이트들도 줄줄이 나오는, 내 어린 사촌동생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명실상부한 힙합의 대표주자. 빌보드 앨범차트 몇 주 연속 정상 같은 것은 그에겐 우습지. 게다가 평단도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지. 평론가들의 베스트음반 리스트에 그의 음반은 자주 등장하고 각종 비평지들도 별 네다섯을 안겨준다 하네.

하지만 난 받아들일 수 없었어. 네가 요즘 에미넴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무심히 말할 때 난 느릿하게 얻어맞는 기분까지 들었다. 처음엔 네가 가사를 모르기에 좋아하리라 생각했어. ‘치마만 두르면 뭐든 다 fuck해버릴 꺼야’‘난 노예의 주인이 된 것처럼 내 성기를 마구 움직였지’‘갈비뼈 없는 X같은 년들’‘레즈비언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그들을 강간한다’‘파멜라 리의 젖꼭지를 찢어 내버리고 그 년을 후려쳐서’ 등등의 가사를 안다면 네가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지독한 폭력과 혐오로 가득찬 그의 노래들을 어떻게 여성인 네가 좋아할 수 있겠냐고 그리 믿었지.

그런데 너는 에미넴의 노래 가사를 보았다 했어. “난 그냥 웃기던데. 정말 무뇌아 같은 놈이군, 웃긴다- 그러고 말아.” 나는 하얗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가 그저 농담이고 환타지라 하지. 그가 금지된 것에 대한 꿈을 풀어내는 뛰어난 작사가이고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도 봤어.(그 금지된 것에는 열다섯 소녀를 죄의식 없이 강간하는 것도 포함돼 있지) 그리고 그의 악동 이미지가 오히려 매력포인트로 작동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평들보다 난 네 말이 더욱 놀라웠어.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너는 변명하듯 말했다. “에미넴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냐. 귀에 들어오는 노래들이 있는데 그게 그의 노래들이었을 뿐이야. 이런 내가 생각 없어보여 싫을지 몰라도… 그냥 그런 거야.”

아니, 난 널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생각 없다 판단하지도 않아. 다만 혼란스러운 거야. 만약 에미넴의 가사가 ‘만나는 한국인마다 두들겨 패줄 거야’‘어느 재수없는 한국인의 목을 땄지’ 등으로 이루어졌다면 아무리 노래가 귀에 들어온다 해도 너는 그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아마 에미넴은 모든 한국인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고 그의 음반에 호의적인 평가를 준 평론가들까지 테러의 대상이 됐겠지. 그가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는 순간 반미감정까지 폭발했을 테고. 그런데 왜 여성들은 그런 공통의 분노를 느낄 수 없게 돼버리는 걸까. 너도 알잖아. 네가 여자라는 걸. 그가 공격하는 건 우리야, 바로 나이고 너야. 그렇지 않니?

게다가 그가 뱉어내는 가사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헛소리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위협인 거잖아. 그래서 난 두려워. 실제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 이곳에서 에미넴의 노래는 단순한 불쾌감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혐오가 금지된 듯 해도 실은 장려되는 사회에서 그것들을 노골적으로 펼쳐내는 에미넴의 가사는 반사회적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어떤 통념과 권력관계를 바로 드러내기에 문제인 거잖아. 에미넴이 무뇌아로 표현된다면 그건 지나친 솔직함 때문이란 것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나도 그런 가사들을 보고 그저 웃어넘길 수 있다면 좋겠어. 하지만 웃어넘긴다는 건 그만큼의 파워가 있을 때 가능한 거겠지.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가 약자라는 걸 알아. 언젠가 저 가사들을 웃어넘겨도 되는 시기가 올까? 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홍문 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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