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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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오전 11시.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는 이 시대의 내노라하는 문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는 지난 2월 28일 해방 57년만에 처음으로 국회의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발표한 후 두 번째로 친일 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국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친일문제를 거론한 그 역사적인 첫 물꼬를 튼 사람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하 의원모임)의 회장 김희선(민주당) 의원이다. 광복절 이틀 전, 명단 발표 하루 전에 그에게 친일역사 청산의 의미를 들어봤다. 김 의원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친일역사 청산의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가 태어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었다. 그의 조부는 일제 때 독립군 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 장군이며 선친은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독당의 비밀 청년당원이었던 김일련씨다. <편집자>

- 1948년 반민특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해방공간에서 친일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채 반세기가 흘렀다. 지금 시기에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반민특위가 친일세력에 의해 습격당하고 공중분해되면서 친일역사 청산이 중단됐다. 해방 직후 친일반민족 세력이 처벌은커녕 권력을 쥐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가치관의 혼란이 발생했다. 정의냐 불의냐가 아닌 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사회의 가치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친일역사 청산은 반드시 필요하다.

동시에 친일역사 청산문제는 국민 대중에게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작업이다. 오늘은 내일의 역사다. 오늘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내일을 검증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와 민족 앞에 죄를 지으면 반드시 단죄한다는,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시대를 살 때 올바로 제대로 살게 되는 것 아닌가.”

- 전체 국회 차원에서 논의되면 국민 합의를 끌어내는 데 좀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동의한다. 그러나 현역 국회의원들 중에는 친일문제가 나오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 한 의원의 경우 아버지가 가미가제 특공대에 비행기를 사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국회의원들이 했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말이다. 국회 차원의 노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입법을 추진중이다. 법이 제정되면 국회나 행정부에 진상규명 위원회가 설치돼 말 그대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16대 국회 내에 꼭 제정되도록 할 생각이다.”

- 최초의 여성 총리가 불발에 그쳤다. 김 의원은 장상씨가 김활란의 친일에 관한 정확한 역사인식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상 전 총장이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는 것은 분명 환영한다고 밝혔다. 여성운동사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니까. 그러나 여성과 남성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달라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기본입장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친일 명단 발표 이후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격려를 받은 이유 중 가장 큰 것 하나가 ‘국가관과 역사관의 검증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누가 총리할 때 ‘당신의 역사관은 어떠한가’ 하는 식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친일한 김활란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가관·역사관이 반드시 검증해야 할 하나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사실 제일 먼저 들어가야 하는 내용 아닌가.”

-의원모임을 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년6개월여 동안 주목할 활동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일본 헌병을 했던 김창룡이란 인물이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기가 막혔다. 내가 국회에 온 이유는 통일문제, 민족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국회 내에 반민특위가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니까 먼저 연구 단체로라도 만들자 해서 구성된 것이 바로 의원모임이다. 여야를 떠나 29명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역사 왜곡 사건으로 매우 시끄러웠다. 우리는 난리가 났는데 외국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서는 일본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시디롬 800여 장을 제작해 외신 기자, 주한 외국 대사관, 유엔에 보냈다. 왜곡된 채 알고 있거나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됐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것이 모임의 첫 성과물이라고 한다면 올 2월 28일의 명단 발표는 두 번째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 친일문인 명단 발표가 있기 1시간 전에 ‘독립지사 초상도안 화폐발행 의견서’ 전달식을 갖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친일파 청산운동은 과거의 운동방식처럼 소위 말하면 우리끼리 하는 운동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평소 여성운동의 대중화, 통일운동의 대중화, 민주화운동의 대중화를 주장하고 있다. 같은 선상에서 친일 청산운동도 대중화돼야 한다. 대중화의 구체적인 예로 화폐에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넣도록 추진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친일청산의 의미에 대해 일상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의원모임은 친일역사 청산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의 하나로 ‘(가칭)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9월 5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법조계, 역사학계, 언론계 등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한다. 이날의 토론을 거쳐 국회 제출을 위한 법안으로 최종 확정하게 될 예정이다.

신민경 기자 minks02@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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