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라면 그것이 문제였을까. 여전히 나는 여성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해낼 수 없지만 여성주의라는 낱말을 둘러싼 모든 의식과 감정과 형식과 내용을 사랑하게 됐다. 물론 비판정신을 잃지 않은 채로. 비슷한 시기에 두 가지 현실을 마주하게 된 나에게는 아주 많은 혼란의 시간이 찾아왔다. 여성운동이라면 마치 신사회 운동의 한 범주쯤으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우리 학과 대부분의 활동가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은 시민운동의 범주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은 노동운동만이 진정한 운동이라고 은근슬쩍 주장하는 활동가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수많은 회의로 가득 찬다.
왜 그렇게 운동을 단일한 것으로 간주하는지, 어쩜 이렇게까지 여성운동에 대한 이해, 여성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인지. 아니,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원에 다니며 주류 사회학, 주류 NGO학의 ‘연대논의’를 지켜보자면 여성운동, 장애인운동, 성적소수자 운동 등 ‘소수자의 운동’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이 땅의 ‘운동’은 민주주의 달성을 목표로 자본주의 철폐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NGO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학과에서 이야기되는 수많은 ‘운동 논의’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자본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수준이 전부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만든다. 인간의 역사가 ‘그의 역사(History=His+Story)’로 불리듯 이 땅의 운동은 ‘그들의 운동’에 다름 아니다. 소수자의 운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여성운동을 비롯해 수많은 소수자의 문제에는 사실 민주화의 문제와 자본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화의 문제와 자본의 문제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그것도 상당 부분.
페미니즘 역시 대부분 사회이론이 그렇듯이 다양한 이론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여성의 평등한 교육권 쟁취를 통해 해방을 지향했던 자유주의 여성해방론을 비롯해 자매애를 소리 높여 외치는 급진주의 여성해방론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주제인 여성해방을 위해 취하는 이론적, 실천적 수단은 다양하다.
대부분의 운동가들, 특히 민중운동을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해방의 궁극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인 관계’라는 대립구도를 상정한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계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급진주의 여성해방론의 경우 이 사회의 불평등한 모순을 없애기 위해 설정한 대립구도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아닌 ‘남성과 여성’이다.
민중운동가들이 이 사회의 대립계급을 자본가와 노동자로 상정하고 사회의 모순을 ‘자본’에서 찾는 반면, 급진주의 여성 해방론자들에게 사회 모순은 남녀간의 성차에 있다는 말이다. 성적소수자가 겪는 차별 역시 자본의 문제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내일 당장 자본주의가 모순을 극대화해 노동자민중이 피의 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 세상이니 **주의 세상이니를 건설했다 하더라도 성적소수자의 차별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현재의 ‘운동논의’는 다분히 체제적인 접근만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노동가들의 인식수준 또한 소수자의 운동이 설 수 있는 자리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소수자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주류 운동 세력가들의 틈새를 공략해야 한다고 본다. 즉, 스스로 비주류라고 생각하는 그러나 주류인 그들에게 소수자의 권리와 논의의 유의미성을 주입시켜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운동가들은 소수자의 문제 역시 민주화와 자본의 문제 해결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있는 영역의 ‘개량운동’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그런 저급한 인식에 변화를 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일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은 거시적 차원의 논의에 머물러 있다. 사회는 다양해지고 사회문제 역시 다양해지고 다양한 사회적 요구가 명백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싸잡아 ‘민주화!’‘혁명!’으로만 초점을 맞추는 일은 너무나도 많은 소수자들과 활동가를 소외시킨다. 그것은 진정한 ‘운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