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패배를 딛고 전복을 꿈꾸자.

아무리 우겨봐도 지난 7월 31일 한국여성들은 패했다. 건국 이래 최초의 여성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그 순간.

뒤돌아 생각해보면 민주당이 자유투표를 제안할 때 이미 감을 잡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당론으로 밀고 나간다면 어느 당이 그렇게 겁없이 부표를 던졌을까. 8?보선이 코앞이고 연말 대선까지도 5개월이 채 안남은 상태에서 제아무리 여성들의 정치력을 우습게 보기로서니 그처럼 막무가내로 표결에 나섰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임기말 누수현상이 심각한 현 정부 입장에서 누구를 내세워도 쉽사리 국회 인준을 받기 어려운 국면을 무난히 돌파할 카드로 ‘여성총리’라는 묘수가 탄생했음은 누구라도 쉽게 간파하는 바였다. 적어도 언론이 북치고 장구치며 나설 때-스스로 주류를 자처하는 언론들은 결코 여성을 같은 메인스트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들은 그들 나름대로 주류적 행태를 집요하게 꼬집으며 모처럼 상부상조했다-까지는 그 인사의 절묘함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최초가 갖는 의미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분으로 당내 표 단속도 하기 어려운 처지인데다 청와대와 좀 더 거리두기를 원하는 민주당이 자유투표를 제안했고 한나라당 역시 홀가분하게 표결에 나설 수 있으니 선뜻 응했다. 이 때 의원 개개인의 성차별 의식이 걸러질 장치는 이미 제거된 것이다.

이번 결과를 두고 남성들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시민단체들 사이에선 우리 사회가 지도자의 도덕성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승리한 양 기뻐하며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그렇다. 정치지도자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의무를 지게 하려는 시민운동이 일정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 맞는 말이다. 현정부가 과거 정부들 같으면 맞지 않아도 좋았을 수준의 과오로도 숱하게 철퇴를 맞은 것 또한 그런 우리 사회의 도덕적 성숙으로 보지 않을 이유는 굳이 없다. 국회가 자유투표를 실시하는 자체도 정치적으로는 분명 발전된 모습임이 분명했다. 많은 수의 국민 대중 역시 우리 사회의 부패하고 무책임한 주류세력이 일격을 맞은 양 기뻐하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다면 두서없이 한번 묻자. 그런 잣대를 분명히 모든 남성 정치인들에게도 똑같이 맞추도록 강제할 자신이 있는가. 주류세력의 전형인 출마자들을 모조리 낙선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사회단체들로선 과거에 낙선운동도 벌였었고 의정모니터 활동도 활발히 벌였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할 일 다했다고 답하고 싶은가.

자식들의 병역비리 논란이 끊이지 않고 호화빌라 사건, 손주의 미국 국적 취득을 목적으로 한 원정출산 의혹이 잇달아 온 대통령 후보를 앞세운 정당, 그 당 소속의 국회의원들이 과연 청문회에서 위장전입 문제에 그토록 당당하고도 집요하게 질문을 퍼부어댄 것이 도덕적 승리로 평가돼 마땅했던가.

올해 연말 한국사회가 지역주의의 그 완고한 틀을 깨고 총리인준을 위한 청문회장에서와 똑같은 도덕적 심판을 내린다면 그 때는 분명히 우리 사회의 도덕적 승리를 한목소리로 외쳐도 좋다.

만약 그 심판이 남성들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청문회장에서의 일회성 이벤트로 그친다면 우리 사회가 최초의 여성총리서리에게 들이댔던 잣대는 분명 성차별적 이중적 잣대였음을 입증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한 상처를 여성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 절반의 상처를 남겨둔 채 우리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 여성들도 생각을 한번 뒤집어보면 어떨까. 만약 여성 스스로 이번 청문회 결과를 여성들의 패배가 아닌 우리 사회의 도덕적 성숙을 드러낸 결과로 만들어낸다면, 주류사회를 향한 전복적 도전을 시작한다면…

그건 또한번 전복의 역사를 쓰는 것이고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성취감을 바탕으로 곧이어 우리는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여성 지도자를 찾아내는 기대, 여성들의 정치력이 진일보하는 기대를 새롭게 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도덕한 정치인들이 득실대는 현실 정치판, 성차별적 정치인들을 만든 건 우리 사회고 우리 유권자들이다. 그런 유권자 안에는 물론 우리들, 여성들도 있다. 여성들이 확보할 지분은 50%를 넘는다.

홍승희/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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