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작업 과정

대개 미술가라면 왠지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서 간간히 작가의 특유한 예술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관객들에게 짐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난 23일까지 인사동 관훈 갤러리에서 <상실의 상실>전을 연 작가 황혜신씨의 작품세계는 다름아닌‘내가 마주 한 현실’이다. 갤러리 앞문에서부터 관객을 맞이하고 있는 실물 크기의 장님 구걸꾼도 무심히 지나쳐 버린 우리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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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곁에서 흔히 벌어지는 장면들이 제 작품이죠. 하지만 그냥 지나쳐버리는…. 돌아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외면하는 자화상일 수도 있어요. 전시장이라는 낯선 공간 안에 설치된 그런 인물상을 통해 그들에게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황금만능>이란 제목의 작품은 검은 안경을 쓴 장님의 구걸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물질만을 맹목적 가치로 쫓아가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첫눈에 작가의 관심이 현대사회의 부조리에 발을 딛고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전시된 6점의 작품은 모두 지인들을 독려해 장장 10시간이 넘는 석고 캐스팅 작업으로 신체 본을 떴다. 작가는 작업과정 자체가 ‘고난’이었다고 말했다. 모델 중 2명은 석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 쓰러지기도 했다.

“모델들이 떠진 본을 보고 흉물스런 허물을 벗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뼈를 던지는 부부 시리즈는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폭력이 돼 상대방 뼛속 깊이 박히고 또 그 말이 갈려져 또 다른 비수를 만드는 애증의 관계를 표현했다. 남의 말에 상처받고 이를 곱씹었던 이들이라면 ‘바로 내 모습이군’하고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카드대출, 연체대납 등 전단지 광고 앞에서 토하고 있는 넥타이맨의 모습(<새벽>)은 여명이 비추는 새벽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작가 자신이 모델이 된 <저녁>은 교복이 파헤쳐진 채 핸드폰을 쥐고 쓰러져 있는 여고생의 모습으로 관음적인 세상, 소통하고자 하는 이의 몸부림을 말한다.

상실의 상실? 전시회는 어쩌면 우리가 평소 무엇을 잃고 사는지조차 망각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작가는 부유한 집안 환경에서 가난까지 두루 경험하면서 삶의 쓴 맛을 더 실감했을 수 있을 터. ‘짱’들에게 대걸레 자루를 가하는 한편 아이들과 함께 퍼포먼스 수업을 하는 등 예사롭지 않았던 미술 선생의 경험도 모티프 설정에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작가에게선 기본적으로 사회를 바꾸고픈 혁명적인 기질이 엿보인다. 내면의 화를 참지 못한다는 건 열정이 풋풋하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미술가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확인시켜 주는 전시회였다.

이박 재연 기자reviva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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