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수다 콘서트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100여 년 전에 벌써 여성이 자립하기 위해선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오늘 이 땅의 기혼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가정은 당신들의 천국, 그러나 그녀들에겐 지옥일 수 있는 곳. 4인 가족을 둔 30대 전업주부의 월 평균 가사노동 가치는 150만원. 그러나 그녀들은 여름휴가도 퇴직금도 없는 전지전능한 파출부.“당신 집에서 하는 게 뭐냐”는 사정 모르는 남편들을 대하면 전국주부연대 총파업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그러나 본업에 너무도 충실한 나머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요원하기만 한 그들.

@23-3.jpg

이들의 삶을 수다와 노래로 풀기 위해 4명의 마녀가 다시 뭉쳤다. 여성운동가 오한숙희, 페미니스트 가수 안혜경과 지현, 배우 오은숙이 바로 마녀를 자청한 장본인들이다.

이들이 한판 걸지게 벌이는 무대는 이름하여 <수다콘서트>. 지난해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 치러지는 이번 콘서트는 대중문화가 건드리는 여성의 모습이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감각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 진정한 여성의 삶을 이야기와 노래, 뮤지컬로 꾸몄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편견과 폭력, 여성의 몸과 일, 사회참여 등에 관한 일상적인 수다를 도구로 신명나게 한판 벌여보자는 것이다.

11일 고양시청 문예회관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걸음마를 갓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온 30대 미시족부터 반짝이 옷으로 젊은 감성을 자랑하는 70대 할머니까지 세대를 초월한 많은 관객들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지현의 도전적인 노래가 주부들에겐 일견 어색할 법도 했지만 카리스마 있는 노래, 귀여운 배(!)를 살짝 드러내는 솔직한 무대매너는 아줌마 관객들에게도 사랑스럽게 다가갔다. 참한 여자, 정숙한 여자, 능력있는 여자 등 남성 위주의 시각이 반영된 <끝내주는 여자>에 일침을 놓고 <고추밭> 세상을 풍자하는 안혜경과 오은숙의 무대는 나이로 보여주는 연륜 탓일

까. 관객들에게 여신과도 같은 편안함과 가슴뭉클함을 선사했다.

연출가 문성희씨의 말처럼‘유독 비생산적이고 낭비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온’여성들의 수다가 노래 막간에 오숙희씨의 입을 통해 뿜어져 나온다. 영양사, 경비원, 자녀전용운전사. 직업으로 치자면 30여가지가 거뜬히 넘는 전천후 주부의 일상이 웃음 속 한숨으로 다가온다. 관객들은 오씨의 재담에‘맞아 맞아’하며 손뼉을 치다가 곧 ‘휴우’하는 한숨을 내뱉는다. 콘서트 내내 가정 속에 침잠해있던 여성들에게 서로를 연결해주는 끈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 끈은 다름 아닌 자매애다. 그들이 <사랑하는 언니에게(안혜경 노래)> 후렴구 ‘we are the sister, good sister’를 열창하는 동안 그녀들의 반란은 이미 시작됐다.

고기 맛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소리도 질러봐야 아는 법. 우리들의 엄마, 아내, 며느리들은 속에만 담아두었던 얘기들을 수다로 풀고 그것이 다시 메아리져 ‘論’으로 소통됨을 느끼고 돌아갔다.

아줌마를 선동하는 콘서트라고? 천만의 말씀! 쫄깃쫄깃한 인절미같은 수다로 하나가 됐던 치유 콘서트였다.

11월까지. 공연문의(사)여성문화예술기획 02)587-0590~2

이박 재연 기자revival@womennews.co.kr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