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문화로서의 순정만화는 사라지는가

서문다미의 SF순정만화 END'가 7월 15일자를 마지막으로 잡지에서 연재 중단됐다. 'END'가 연재되던 만화잡지 <이슈>에는 “출판사와의 의견차가 많아 연재를 중단합니다”라는 작가의 해명이 간략하게 첨부돼 있었다. 그 글은 “그리고 싶은 만큼 그려야 속이 풀리는 걸 어쩝니까”라는 문장으로 이어졌다. 'END'는 현재 순정만화잡지에서 연재되던 유일한 SF였다.

'END'의 연재중단은 최근 몇 년간 순정만화시장의 변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요 2∼3년간 순정만화 시장은 일련의 뚜렷한 경향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미소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학원연애물로의 일렬 줄서기다. 예쁘고 스타일리쉬한 그림체 속에서 10대 학생인 주인공들은 연애를 한다. 여기에는 별다른 서사가 없다. 분위기는 가볍고 코믹하다. 그리고 이 만화들의 핵심은 감상용(정확히는 관상용) 미소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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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잡지 '이슈'에 연재되다가 돌연 중단된 서문다미의 SF 순정만화 'END'.

‘순정만화=청춘연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 순정만화란 원래 그런 거 아니었어? 그게 뭐 최근의 경향이야?”라고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순정만화가 이룩한 성취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최근의 흐름은 무척 기이한 후퇴처럼 보일 수 있다.

여성의 삶에 대한 섬세한 접근, 그 속에서 빛나는 성찰 등은 순정만화가 여성에 의해 생산되고 여성에 의해 소비된다는 강점을 십분 살린 결과였으며 이 일군의 만화들 속에서 독자들은 ‘여성의 시선’이 어떻게 존재하고 표현되는가를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장르 실험, 그림체나 연출의 다변화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이 시기의 성과였다. 다시 말하자면 순정만화라는 호칭이 결코 내용이나 형식적인 요소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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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때 다채로운 빛깔로 만개하는 듯했던 순정만화는 왜 지금 로맨스 일색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END'의 작가 서문다미는 이 질문에 대해 간단히 정리했다.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순정만화의 주 수입은 어디까지나 연애물이고 그 외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작품들은 아르바이트나 가외수입에 해당하는 거죠. 지금 만화계는 계속되는 불황 속에 있어요. 만화잡지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안정적인 작품을 선호하게 되죠. 또 (출판사 입장에서는)서사가 탄탄한 작품보다는 아무래도 가벼운 터치의 학원물이 편하지요. 인기가 없으면 바로 횟수를 줄일 수 있고 인기가 많으면 또 한껏 늘릴 수 있으니까.”

만화는 제9의 예술이라고 하나 현실에서 그것은 수사에 불과하다. “00씨, 예술하고 싶나보지? 먼저 뜨고 해. 그러면 뭐든 하게 해줄게” (이는 순정만화가 P씨가 출판사로부터 들은 말이다.) 결국 만화는 그 매체가 갖고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상업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동종교배를 계속하며 비슷한 작품을 양상해 내는 현실이다. 그리고 신선한 수작들이 나오기보다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만화계는 점점 더 회생의 길에서 멀어져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현 만화계의 불황은 유통망의 폐습, 대여점 문제 등 다양한 원인들이 한데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로 활로를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만화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만 가고 있다. 그리고 여성문화로서의 순정만화의 가능성도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이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시장의 불황에서 다양한 시도가 나오지 않는 것은 수긍이 가는 논지다. 그런데 왜 획일화되는 경향이 현재의 미소년 중심 학원물로 귀결되는가? 지금의 학원연애물은 과거의 다분히 신파적이고 순정적인 연애물과는 또다른 궤도에 있다. 버거운 감정, 비장한 정서는 사절이다. 중심은 스토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캐릭터의 외모와 스타일에 집중돼 있다. 그리고 스타일리쉬하고 산뜻하고 끈적임없이 가볍게.

지금 소녀만화에서 나타나는 이런 경향은 현재 만화의 주소비계층인 10대와 20대의 삶의 태도와 맞닿아있다. 유희로서의 시각적 쾌락이 사유를 압도한다. 가치 판단 기준은 ‘재미있다/없다’다. 그리고 이것이 세련된 삶의 태도다. 현재의 학원연애물에 결여돼 있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다. 그러나 사실 진지해봤자 별 수 없는 것이다. 더 갑갑하기만 할 뿐. 현재는 어찌해도 변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의 방향은 굳어졌고 우리가 살아야하는 삶의 방식도 정해져있다. 그렇다면 이 삶을 즐기는 방법으로 가능한 것은 이 현실에 예쁜 포장을 씌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약한 서사를 가리기 위해 리본을 달고 꽃치장을 하는 게 아니라 이 꽃치장과 리본이 그 자체 목적이다. 그것이 젊은 여성이 삶을 살아가는(어쩌면 견디는) 하나의 방법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물론 그 즐거움이 여성주의적인 성찰을 결여할 때 결국은 보수적인 논리에 잡아먹히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여성이 이성애 관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여전한 사회경제적 여건 속에 연애 환타지의 위험성은 다시 언급할 필요 없을 것이다.

시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취향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하나의 취향이 다른 것을 모두 잡아먹는 현상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화적 척박함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척박함과 천박함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취향 역시 사회구조 속에서 만들어지고 장려되는 것임을 생각할 때 ‘다만 취향일 뿐’일 수는 없다.

홍문 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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