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숙/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회원

양성평등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호주제를 유지하자는 주장들을 보면 설득력이 있거나 양성평등의 이념과 맞바꿀 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는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어린 아들이 엄마보다 호주승계 순위가 선순위이고 엄연히 모자지간임에도 이혼이나 재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동거인으로 기록되는 등 명백한 여성차별에 대해서 “나는 남성우월주의자요!”라고 천명하지 않는 이상 호주제를 전적으로 옹호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주제를 그대로 쓰자는 쪽보다는 얼핏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는(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말이 나오는데 그건 바로 “호주제를 고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호주제를 수정할 수 있을까? 아니 몇 가지를 수정한다고 해서 호주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미 수 차례의 개정이 있었음에도 남아있는 호주제라는 제도 자체(부가입적)로 인한 가부장적 문화, 남아선호 의식을 불식시킬 수 없다면 도대체 호주제를 폐지하지 말고 수정하자는 건 단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을지언정 정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족문화에 걸맞는 제도는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상상을 해보자. 자식이 딸이라는 이유로 결혼과 동시에 다른 가에 입적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래서 법적으로 직계존속이 시부모니 친정부모니 하는 말들이 일체 없어진다면, 출가외인이라는 단어조차 사라진다면, 효자상과 더불어 효녀상(효부상이 아니라)이 있는 사회라면 말이다. 그래서 자식이 딸이라고 해서 결혼제도를 통해 남의 집안에 보낸다는 심리적인 박탈감이 없고 딸에게도 엄마의 성씨를 물려줄 수 있는 사회라면 그래도 아들을 선호할까. 그저 아들 딸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고 여아라는 이유로 낙태시키는 지경에 이를까.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만 아들을 천성적으로 선호하는 것이 아닌 이상 아들선호의 가장 큰 이유가 대 잇기라는 응답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와 같이 양성평등한 가족제도와 가족문화가 확립된다면 여아라는 이유로 낙태시키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땅의 여성들이 가정 내 정체성을 상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단순히 호주제 폐지를 ‘이혼한 여성의 자녀의 성씨를 계부의 성씨로 바꾸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분들, 혹은 그렇게 호도하는 분들은 호주제도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십년간의 호주제로 인해 아버지와 성이 같아야만 정상으로 여기는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렇지 못한 소수의 피해가정을 구제하기 위한 친양자제도는 정말로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호주제 폐지로 가기 위한 하나의 중간적 과정일 뿐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건 여성차별과 배타적인 가족관을 불식시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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