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숙/ 이화여대 국제 대학원 교수 choks@ewha.ac.kr

요즘 귀가 따갑도록 들은 농담이 여성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 1순위가 남성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는 것인데 이는 여성이 군대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축구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젊은 여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월드컵기간 중 보여준 아줌마들의 축구열기는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왜 아줌마들은 응원을 하러 거리로 쏟아져 나왔나?

첫날 아줌마 부대를 광화문에서 목격했을 때 역시 대한민국은 한 외국회사원의 증언대로

‘밤의 천국’이구나 생각했다. 넘쳐나는 룸살롱과 가라오케는 남성의 여가문화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마땅한 놀이가 없던 아줌마들이 새로운 놀이를 발견했고 그것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알았던 것이다. 물론 축구경기의 규칙이 단순해서 이해하기 쉽고 경기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도 새로운 관중을 동원하는 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거리에 중년 남성은 없고 아줌마들만 보이느냐 하는 것이다. 나도 대부분의 월드컵경기를 여성 동료들과 함께 젊은이들로 가득한 대형 호프집에서 관람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을 따라하는 것이 그렇게 쑥스러울 수가 없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남성적 문화에 길들여진 내가 벗어 던지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체면이었다. 하지만 횟수가 거듭할수록 나도 다른 여성들과 하나가 되었고 경기가 끝난 다음에는 거리낌없이 거리응원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아줌마들이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표현에 솔직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젊은 남성들이 액세서리와 페인팅으로 온 몸을 치장할 수 있는

것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솔직함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늘 남을 위해 희생해온 아줌마들은 자신을 버리고 남과 하나가 되는 공동체 문화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성의 유전자 속에는 공동체의식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말을 안 듣는 남자, 지도를 못 읽는 여자>라는 책에 나온 것처럼 남성은 숨어서 먹이감을 기다리는 사냥문화에 익숙하고 여성은 집에서 공동체를 돌보면서 갈등을 조정했던 살림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성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 연령, 지역, 계층을 초월해 타인과 하나될 수 있기에 자신있게 광장으로 몰려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축구는 가장 남성적인 운동이다. 엘리트 스포츠로 시작한 축구가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운동이 된 데에는 바로 이 남성적 문화가 한몫 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붉은악마의 창의적이고 기발하면서도 다양한 응원전은 축구구경을 전 국민의 축제로 승화시켰다. 축제에 동참하면서 우리는 하나됨을 느꼈고 광장과 거리에서 잃어버렸던 공동체의식을 되찾았다.

우리는 원래 공동체 문화의 뿌리가 매우 강한 나라였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완고한 집단주의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집단주의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해체되면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됐다.

월드컵 기간에 나타난 공동체주의는 철저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집단주의 문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우리의 응원전을 지켜보면서 국가주의와 획일주의의 발흥을 경계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붉은악마는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문화를 확산시켰고 이에 익숙한 아줌마들이 먼저 그들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이번 월드컵 기간 중 가장 소외감을 느낀 사람은 어쩌면 중년남성들이 아니었을까. 젊은 가장들은 가족을 데리고 경기장을 찾았고 신세대는 혼자서 거리로 달려나가 거기에서 만난 남녀노소와 하나가 됐다. 하지만 중년남성은 거리로 나설 엄두는 낼 수도 없었지만 축구장 일등석에 앉아서도 남의 눈치를 보느라 또는 축구경기를 분석하느라 팔 한번 제대로 뻗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주류는 밤에는 룸살롱을 전전하면서 낮에는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위선으로 가득 찬 중년남성들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들에게는 붉은악마의 문화적 반란이 약간 당혹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거리응원은 엄숙주의의 상징이었던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광장으로 끌어내 발랄한 놀이의 소품으로 삼은 문화적 반란이었다. 밀실에서 정보를 주고받고 독선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한 이들에게 모든 사람이 소리를 높이는 광장은 공포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밀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주류 남성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있으니 정치가 매일 기싸움과 부정부패로 점철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란 갈등의 공정한 조정을 의미하며 이는 투명성과 유연성을 생명으로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왜 여성이 정치를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민주정치는 그리스의 광장에서 태동했다. 그래서 공동체문화 없는 민주정치는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 밀실정치를 광장으로 끌고 나와 엄숙하고 경직된 정치를 유연하고 신명난 놀이판으로 만들어 보자. 놀이가 삶의 일부인 것처럼 정치도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들어보자. 우리 사회의 비주류가 주류 정치를 전복하는 순간이 바로 한국정치 발전의 원년이 될 것이다. 공동체문화에 익숙한 아줌마들이 자율성과 비판정신으로 무장된 신세대와 손을 잡고 우리 정치판을 확 뒤집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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