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여성미술제-동아시아 여성과 역사’ 참관기

난 미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 중고등학교 미술시험 직전에 허겁지겁 외워 삼킨 몇몇 미술가들의 이름이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럼에도 머리 속이 온통 헤집어 놓은 솜뭉치처럼 느껴질 때 난 때때로 미술관에 가고 싶어진다. 그녀들의 작품 앞에 서서 몸 속에 신선한 물을 붓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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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지금 ‘그녀들’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난 거의 여성작가들의 작품 앞에서만 어렴풋이나마 무언가를 느낄 수가 있다. 이건 비단 미술분야에서만이 아니다. 소설이나 시에서도 여성들의 것은 보다 생생하게 내 안으로 다가오는 반면 남성작가들의 작품과 만날 때는 그런 ‘열림’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남성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여성인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뒤틀린 채 가로막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번 ‘동아시아 여성과 역사’전 에서 본 필리핀 작가 카렌 플로어(Karen Flore)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실로, 우리들의 목소리와 작업은 나무 작품으로부터 기어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발견되거나 쓰여질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문헌의 수사학이 공언하듯 떠오르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작업은 항상 말해왔듯이 내가 이곳에 존재함을 그리고 언제나 존재해왔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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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구절은 내가 왜 여성작가들의 목소리의 파동에 더욱 민감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남자들의 머리 속이 아니라 내 경험 자체로 존재하고 싶은 거다. ‘제2회 여성미술제- 동아시아 여성과 역사’의 의미 중 하나도 그것일 터이다. 묻힌 채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스스로를 전시하고 있었다.

그 날은 전시 마지막 날이었다. 준공만 마친 휑뎅그레한 건물 안, 나에게 반말로 응대하는 거만한 수위 아저씨를 지나 도착한 인적없는 전시장에는 우아- 목소리들이 와글대고 있었다. 난 그 목소리들이 참 좋았다.

내가 레즈비언 아티스트 이토 타리의 퍼포먼스 비디오를 보기 위해 바닥에 앉았을 때 그 TV 너머 뒤쪽으로 4.19 등의 현장사진을 작가의 몸에 합성한 사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필리핀 여성들의 삶들을 상징하는 여러 도상들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일본계 미국 여성들의 다양한 진술들이 불빛처럼 펄럭이고 있었고 내 뒤로는 대만 여성 섬유노동자들의 고단한 생애들이 재봉틀 소리와 함께 찍혀 나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아방궁프로젝트 무산에 대한 항의가 꽃분홍빛으로 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들이 서로 섞이고 만나고 부딪쳐 반향을 내는 공기를 향해 순간 손을 내밀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에는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공간에 가깝게 붙어있어 각각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바퀴 돌아보고 난 후 전시장 가운데 바닥에 앉아 이 모든 소리들이 서로 얽혀 미묘하게 어우러지는 리듬감과 반향을 느끼면서 그 처음의 생각을 즐거이 취소했다.

그 작품들 속의 여성들 혹은 여성인 그 작품들은 그 자체로 생생한 존재감을 갖고 있으면서 서로에게 배타적이지 않았다. 존재감은 각각이 놓인 구체적인 현실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란 하나의 분명한 단어로 설명되거나 명확히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풍부한 결들을 함축한 채 서로 섞여있는 것일 거다. 역사란 한 줄로 꿰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전시회는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작품 앞이 아니라 작품들 가운데 앉은 내 몸. 그 몸 속으로 물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목소리들은 서로 만나며 새로운 말을 만든다. 난 좀 더 예민한 촉수로 대화하고 싶어 손을 뻗었다.

홍문 보미·lilith58@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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