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닉 룸>에는 몇 개의 ‘패닉 룸’이 존재할까? 이혼한 맥은 딸 아이 사라와 함께 ‘절대 안전한 도피처, 패닉 룸’이 있는 거대한 뉴욕 맨하탄 저택에 이사온다. 이사 온 바로 그 날 밤 삼인조 강도의 침입을 받는다.

바로 그 패닉 룸을 설계/설치한 기술자 바넘이 끼여 있는. 이제 모녀와 삼인조 강도, 두 팀간의 밀고 당기는 체스 게임이 시작된다. 공포의 도가니로서 그리고 공포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로서 ‘패닉 룸’은 이미 말 자체로 이율배반의 함정이다. 그러나 영화 <패닉 룸>에는 이것 외에도 다양한 이율배반과 모순, 분열이 조각난 거울 면에 반사되는 이미지처럼 많은 패닉 룸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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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는 다른 여자에게 가기 위해 나를 버렸다. 게다가 아이는 당뇨병을 앓고 있는 사춘기 소녀다. 나는 두렵다.’ 이렇게 그녀는 삼인조 강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패닉 룸에 갇혀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계속해서 말한다. 아무리 넓은 공간에 가도 너의 폐쇄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세 명의 강도가 침입했을 때 그녀는 두 개의 겹쳐진 패닉 룸 속에 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포박하고 있는 내부의 ‘저’ 패닉 룸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외부의 패닉 룸으로 들어간다.

<패닉 룸>은 이혼모가 된 한 여자가 뚫고 지나가야 하는 통과제의다. <패닉 룸>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은 사건이 완결된 후 이어지는 몇 쇼트들이다. 사라는 피투성이로 나뒹구는 실상 그들의 구원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던 친부를 위로한다. “아버지, 괜찮아 질 거에요.” 그러면서 그녀는 뒤에 서 있는 어머니를 쳐다본다.“난 괜찮아.” 대답하는 맥의 시선은 여전히 팽팽한 긴장을 담고 있다. 이어 카메라는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바넘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마치 맥이 그를 뒤돌아보고 있다는 듯이. 이 일련의 시선 흐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바넘. 패닉 룸의 설치자, 흑인, 이혼남. 맥처럼 그도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맥의 더블이다. 아버지로서 그의 홀로서기는 아이들의 양육비를 댈 수 있는 능력여부에 달려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객들은 그가 이 체스 게임에서 궁극적으로 수행하는 더블로서의 역할에 점점 주목하게 된다. 그는 맥과 번갈아 가며 패닉 룸을 점령하고 패닉 룸에 갇히며 맥을 대신해 쓰러진 사라에게 주사를 놓아준다. 사라에게 어머니를 돌려주기 위해 다른 강도에게 총알을 날린다.

여기서 우리는 백인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흑인 남성의 위치가 교묘히 겹치고 있음을 본다. 바넘은 자신이 속해 있던 가족 구조 내에서는 아버지였지만 백인 사회 내에서 그에게 부여된 위치는 ‘여성’의 그것이다. 백인 상류층 이혼녀인 맥과 흑인 이혼남 바넘의 이 더블적 성격은 가부장제에서 동요하는 혼성적 정체성들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사라를 살린 그의 행위는 자기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실천으로, 동시에 사라의 대리모의 실천으로 기입되고 바로 이 분열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의 ‘홀로서기’는 실패한다. 그리고 그의 이 분열, 실패에 기대고 있는 맥의 홀로서기는 바로 이 분열과 실패가 지시하고 있는 백인 가부장제 사회의 구조 때문에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녀는 과연 ‘패닉 룸’을 벗어났는가.

김영옥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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