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있던 날 서해상에서는 남북간 교전이 벌어져 국내인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의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땅에서 치르는 까닭인지 모처럼 월드컵 경기를 녹화중계 했다던 그 북한의 해군 함정이 남한 함정을 포격하고 침몰시켰다는 소식은 전후 사정을 떠나 일단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앞서 월드컵의 함성에 묻혀버린 통곡의 소리가 있었다. 6월 13일 의정부에서 어린 여중생 둘이 터무니없이 질주하는 미군의 대형 장갑차에 깔려 처참한 죽음을 당했지만 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에 몰두한 언론은 그 비극의 현장으로 눈 돌릴 여력조차 없어 보였다.

학교 현장에서는 남자 교사에 의한 여교사 혹은 여학생 성추행을 호소하는 글들이 인터넷을 타고 돌았지만 그 역시 간단없이 무시됐다. 그런 와중에 피해 학생들이 처벌받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들이 발생했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이제 2002년 6월 한달 이 땅을 뒤흔들던 함성이 잦아들면서 언론은 정신이 들기 시작한 듯 현실의 삶을, 분단의 부산물처럼 살아남은 우리의 남루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6월 한달의 열정도 없고 자부심도 없다.

6월 한달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가 됐다는 기쁨을, 행복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한국인, 나아가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도 충만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일순간에 바뀌었다. 언론이 어떻게 여론을 끌고 다닐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주였다.

주로 서해 교전사태에만 눈길을 준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지만 그럼에도 언론은 양극화된 실상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당장 전쟁이라도 한판 치르자는 듯 적대감 부추기기에 나선

신문이 있는가 하면 우선 진상부터 제대로 살펴보길 요구하는 차분한 보도태도를 견지하는 신문·방송이 있고 인터넷 매체에는 그 양편의 입장을 대변하듯 대립하는 의견들이 들끓기도 했다. 당장은 우리측 군인들의 피해가 가져다준 구체적 현실감이 있어 여론이 더 뜨거운 듯 했다. 정치권이야 늘 그랬듯 편갈라 싸웠고 끝내는 사실확인도 이루어지기 전에 확전의 실마리부터 마련됐다.

그 와중에 교전중 죽은 군인들에겐 훈장이라도 수여됐다지만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여중생들에겐 제대로 된 언론의 조명조차 쪼이지 않았다. 물론 일부 진보적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긴 했으나 전체 언론 가운데 그 비중은 적었다.

가해자가 북한일 때와 미국일 때의 명확한 차이. 상대가 북한일 때는 싸우자, 나가자고 외치

다가도 미국에 대해서만은 갑자기 너그러워지는 이 땅의 보수언론을 보며 거기서 한민족의 자부심을 찾을 길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우울한 현실인식만 남는다.

죽음이란 어느 경우나 안타깝다. 특히 앞길 창창하던 젊은 죽음들일 때 그 애달픔은 더 할 수밖에 없다. 서해상에서 숨진 젊은 군인들이나 의정부 길바닥에서 죽음을 당한 어린 학생들이나 다 가슴저린 죽음이다.

그런 죽음이 가해자에 따라 저리 달라져도 좋은 것인가. 이런 생명의 순위 매기기를 벗어날 때 우린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우리에게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했다. 우리가 얻은 자부심은 배타적 우월주의가 아니었다. 단지 식민지 유산으로 남았던 패배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포스트월드컵은 다시 우리에게 민족 내부를 향해 총을 겨누라 하고 생명에도 계급이 있고 값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힘센 람보를 숭상하라고 우상숭배를 강요한다.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확전 분위기를 부추기는 그 움직임에 여전히 무관심할 것인가. 그래서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이 몰아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편집주간 shh@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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