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소녀백서' 와' 고양이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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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여성 성장기 영화라면 그들의 성을 눈뜨게 해주고 급기야는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다소 근사한 ‘남성’과 고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신기하게(?) 극복해나가는 감동의 스토리가 준비돼 있다. 하지만 이 두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와 <고양이를 부탁해>는 얼토당토 않은 여성 성장기 영화의 구도를 벗어난다. 물론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여성 성장기 영화라기 보다는 급속도로 변해가며 획일화되는 현대사회, 원제에서 드러나듯 ‘유령세계’(Ghost world)가 되어버린 미국사회의 단면을 이니드와 레베카를 통해 날카롭게 꼬집어내는 영화다. 하지만 주류사회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는 두 여성캐릭터(주류질서에 ‘여성’만큼 편입되기 어려운 조건이 있겠는가)의 여정은 적나라한 여성 성장기 영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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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삶의 유예기간 속에서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이니드(도라 버치)와 레베카(스칼렛 조핸슨) 의 심드렁한 표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고양이를 부탁해> 역시 교복을 입고 해맑은 얼굴로 깔깔대며 웃던 태희(배두나), 지영(옥지영), 혜주(이요원)가 사회에 발 딛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녀들 말대로 ‘졸업을 한 것만도 신기한’ 이니드와 레베카, 그리고 상고를 졸업하고 막연하기만 한 얼굴로 사회에 던져진 태희와 지영, 그리고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꿈을 안고 증권회사에 취직하지만 ‘저부가 가치 인간’취급을 받으며 서서히 현실에 좌절하는 혜주. 학교와 사회 사이, 삶의 애매한 유예기간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현실로 다가온다. 나이 스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현실은 낯설고 견고하며 여전히 ‘벗어나고픈’ 무엇일 뿐이다.

이 두 영화 속에서 학교를 졸업한 그녀들에게는 번듯한 직장도, 또 그럴듯한 인생의 계획도 마련돼 있지 않다. 게다가 남성들이 얼핏 지나치기에 아까운(?)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에 나오는 이니드는 특유의 시니컬한 농담으로 30분만에 극장 스낵코너에서조차 쫓겨나 백수로 소일하는 데다가 커다란 뿔테 안경에 다소 통통한 몸집이 드러나는 새빨간 원피스, 초록빛 립스틱을 바른 채 매사 냉소적인 표정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에 나오는 태희 역시 아버지의 찜찔방에서 식혜를 나르며 근근히 용돈을 받아 생활하며 다소 부스스한 짧은 머리칼에 둔한 벙어리 장갑, 습관적으로 입에 무는 담배 그리고 몽상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일상을 견디고 있다. 그녀들은 분명 너무나 매력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지만 그것은 남성들의 ‘구원’을 향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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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둘] 그들에게 남성은

오히려 이 두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그녀들을 구원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의 구원조차(?) 힘겨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이니드는 레베카와 함께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듯 잡지를 뒤적이다 스쳐간 금발의 여인을 찾는 광고를 낸 시모어(스티븐 부세미)에게 장난전화를 걸어 불러낸 뒤 접근한다. 그러나 이니드는 차츰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시모어는 자폐적으로 옛날 레코드를 수집하는 데 빠져 있는 사회 부적응자에 번번이 삐긋하는 허리에는 보안대를 칭칭 두르고 다니는 볼품없는 40대 독신남.(‘남자는 허리가 생명’이라는 어이없는 관용어구를 떠올린다면 기막힌 설정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태희는 뇌성마비를 앓는 주상의 시를 타자로 쳐주는 봉사활동을 하다가 서서히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녀들과 이들 남성과의 관계는 다분히 동질감에서 비롯된다. 세상의 질서에 서걱거리는 단절감과 이질감을 느끼는 ‘그들’과 ‘그녀들’은 동시에 소외되어 있다. 그들은 주류 남성의 감수성과는 거리를 갖고 있으며 어정쩡하게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마치 <안토니아스 라인>에서처럼 모든 소외된 인간들을 포괄하는 여성 ‘라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은 다분히 ‘여성적’인 존재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은 사십대 남성과 열여덟 살 소녀의 부도덕한 사랑론에 빠져 있거나 장애우와 정상인의 눈물겨운 사랑의 승리 식의 도식적인 구도를 벗어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의 맥락을 유지한다.

[이야기 셋] 그녀들의 우정

이니드의 단짝 친구 레베카. 시시껄렁한 남성들의 접근을 받곤 하는 레베카는 예쁜 외모의 소유자지만 그녀들 사이에 외모 경쟁이나 남성을 사이에 둔 삼각 대립구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졸업 이후 레베카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커피숍에 취직한 반면 이니드가 시모어와의 관계에 집중하는 사이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그녀들의 가슴아픈 아쉬움이 보여진다.

지영과 혜주 역시 학교 때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혜주가 증권회사에 취직하고 지영이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면서 아슬아슬한 균열이 생긴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한 균열 사이로 보이는 것은 서로의 이해와 지지를 바라는 진한 욕구다. 한편 그림을 그리고픈 지영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지지하는 태희. 그녀는 “니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고 해도 난 니 편이야”라며 지영에게 강한 믿음을 보여준다.

결국 지루한 일상,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멍청한 사회’로부터의 일탈과 독립을 꿈꾸며 맞잡게 되는 건 그녀들 서로의 손이다.

[이야기 넷] 탈출을 꿈꾸며

그녀들은 늘 ‘다른 곳’을 꿈꾼다.

잔뜩 술에 취한 이니드는 시모어에게 “내게는 환상이 있어요. 여기가 아닌 아무 곳으로나 떠나는 환상 말이예요”라고 중얼거린다. 이니드에게 있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늘 버스를 기다리는 노만 할아버지다. 그는 사회의 주류로부터 완벽히 벗어난 늙은 광인일 뿐이다. 그는 늘 “난 여길 떠날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노만은 거짓말처럼 버스를 타고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이니드 역시 그 자리에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태희는 배를 타고 떠도는 꿈을 이야기하다 혜주에게 철이 없다는 핀잔을 듣곤 한다. 태희는 인천 선착장에 붙은 선원 모집광고를 보고 “배를 타고 싶은데요”라고 묻지만 “남자만 배를 탈 수 있다”는 조소 어린 답변만 되돌아온다. 결국 가족사진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도려내고 집을 나온 태희는 지영과 함께 공항으로 향한다.

이런 결론은 다소 황당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물을 바라보는 소녀들에게 현실의 벽을 넘는 탈출구로 화려한 사회적 성공이나 사랑의 쟁취를 제시하는 것만큼 황당한 건 없으니 오히려 그보다는 애매한 경계에서 헤매이던 이들의 도발적인 환상과 탈출이 지독히도 현실적으로 보인다.

문이 정민 기자 knnif@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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