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빨간 옷과 표준만들기
그 빨간 옷과 표준만들기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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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원





전에 브라질에서는 노란색 옷을 입지 않으면 축구 경기장에 들여보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브라질 사람들이 워낙 축구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을 보니 충분히 그러겠다 싶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라는 길거리 응원단 대부분이 그냥 빨간 옷이 아니라 Be the Reds!가 커다랗게 찍힌 ‘그 빨간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처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사람들도 한 게임 한 게임 지나면서 차차 그 옷을 사 입었다. 아마 이번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은 중요한 국제 축구 경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 옷을 다시 꺼내 입고 ‘대∼한민국’ 구호를 외칠 것이다. 말하자면 이 옷과 구호는 우리나라 축구 응원에서 일종의 표준이 된 것이다.



표준은 유행과는 다르다. 표준은 정체성을 드러내고 특정 시스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고 의사소통의 기능을 한다. 교복같이 표준화된 옷은 입는 순간부터 옷에 포함된 여러 의미를 전달한다. 교복을 입으면 학생으로 보호받고 동시에 학생답게 행동하기를 요구받는다. 또 같은 교복을 입었으면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동창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경기가 있는 날 응원장에서 ‘그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는 동지 의식을 느낀다.



표준이 되는 것은 상징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중요하다. 장안에 빨간 천이 동이 날 정도로 그 옷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누군가는 돈을 많이 벌었을 거다. 6월 초만 해도 응원은 좋지만 왜 하필 빨간색이냐던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일단 표준이 되면 개인은 싫든 좋든 그 체제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표준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권력을 가진 쪽이 선택해서, 전문가들이 추천해서, 시간상 먼저 등장해서, 수요가 더 많으니까 등 표준이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옷은 모 통신회사의 광고와 우리나라 선수들의 놀라운 승리 영향이 컸다.



과학기술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대혁명 직후 제도개혁 과정에서 구체제에서 사용하던 복잡한 단위를 버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 체계를 표준으로 택했고 대대적으로 사용했다. 오늘날 전세계가 일상 생활에서는 전통적인 단위를 사용하지만 과학기술이나 공식적인 경우에는 미터법을 사용해야 한다. 표준이니까.



빌 게이츠는 20대에 IBM사에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인 DOS 프로그램의 사용권을 팔았다. IBM과 DOS를 선택한 다른 컴퓨터 회사가 장사를 잘 할수록 빌 게이츠도 돈을 많이 벌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DOS가 개인용 컴퓨터의 표준 운영체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응용 소프트웨어가 DOS에 맞춰 제작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운영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없어졌다(운영체제만 있고 응용 프로그램이 없는 컴퓨터는 깡통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가 그토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우리는 곧 디지털 방송 수신 방식으로 미국식과 유럽식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기술성, 경제성을 놓고 아직도 왈가왈부 말이 많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번 선택하여 표준이 되면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제 월드컵은 끝나가지만 단 한번이라도 Be the Reds!를 입고 싶은 사람은 지금이라도 망설일 필요가 없다. 표준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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