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더 바이 넘버

‘권태는 새로움을 먹고산다.’

영화 <머더 바이 넘버(Murder by Numbers)>에서 캘리포니아의 평화로운 중산층 삶 속 은밀히 펼쳐지는 살인사건을 배태시키고 있는 것 또한 권태다. 그 권태가 일용할 양식으로 선택한 것은 성인들의 속물적 일상을 거부하는 젊은 육체의 ‘자유론’이며 이 자유론의 근거는 동성애적 욕망에 걸려있는 사회적 금기다. 사회적으로 금지된 욕망의 에너지는 오만한 혹은 고독한 철학적 언어의 옷을 빌려 입고 ‘자유’의 이름으로 ‘완벽한 살인’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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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수재형 고교 남학생, 리차드와 저스틴은 현실적인 동기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은 ‘순수한(?)’ (혹은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심 없는’) 살인을 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자신들의 능력을 매개로 서로 ‘승인’받고자 한다.

이제 누가 이 자유 테스트의 희생자가 될 것인가. 물론 임의적으로 선택된 한 여자다. 영화에서 이 둘의 지적, 성애적 욕망은 진부한 속류 정신분석적 ‘왜’라는 질문 없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지탱된다. 그러나 이 둘을 좇는 여형사 케시의 경우는 다른 의미의 길을 간다. 살해된 여성의 난도질당한 몸에서 자신의 몸을 보고, 방안을 가득 채우는 고통의 신음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그녀의 체화된 분노는 손쉽게 속류 정신분석의 틀 속으로 통합돼 버린다.

도대체 가부장제에서 살고 있는 여자 형사가, 육체가 난도질당한 수많은 여성들을 목도하는 여자 형사가, 그들의 살해당한 신체의 고통에 전염되는 데에 그 무슨 정신분석적 설명이, 혹은 그 설명을 요청하는 과거사가 필요하단 말인가.

심리극에 일가견이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바벳 슈뢰더 감독은 살인사건이 종결된 후 뻔한 부연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 알겠지요, 여러분? 우리의 캐시가 그토록 열심히 여성 피해자의 살인자를 찾고자 혈안이 됐던 것은 바로 그녀가 일찍이 남편에게 밤낮 두드려 맞고 급기야는 17번이나 칼로 난도질당한 뒤 거리에 내버려졌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왜 영화는 금기된 동성애의 억압된 욕망과 실패로 끝난 이성애의 외상이라는 이중의 내러티브를 선택하면서 여성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토록 쉽게 속류 정신분석에 빠져버리는 것일까.

<머더 바이 넘버>는 잘하면 21세기형 ‘권태’와 ‘성의 불가능성’에 대한 꽤 괜찮은 재현이 될 뻔했다. 그러나 감독은 플라톤 시대부터 서구에서 관대하게 용인·권유돼 오던 남성 지식인들 사이의 ‘지적 유사 동성애 관계’의 전통에 비성찰적으로 물들어 있다. 그뿐인가. 그토록 많은 긍정적 서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가능으로 남아있는 이성애 관계에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에는 그는 젠더에 대해 너무 무감각하다. 그래서 영화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지루한’ 탐정 스릴러로 끝나고 만다.

김영옥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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