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

2002년 우리의 월드컵은 열광이고 축제였다. 넘치는 열정은 광장이란 공간을 갖지못한 우리의 역사를 넘어 넓은 차도를 가로막아 임시 광장을 만들며 운집하고 함께 열광하게 했다. 낯모를 이들이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한목소리를 내며 축제를 즐겼다.

사회혁명의 과정에 등장하곤 하던 해방구란 바로 이런 공간이 아닐까. 순수한 열정과 열망이 스스로 질서를 배태하고 생산해내며 기쁨과 때로는 아픔까지도 공유하는 시공간. 월드컵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이런 축제, 열광할 기회를 열망해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무엇이 이토록 4천7백만을 하나로 묶어 열광하게 했을까. 우선은 매게임마다 기대치를 높여가며 선전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있다. 또한 ‘축구사랑’ 하나로 온라인 공간을 넘어 거리에서 뭉친 자발적 응원단 ‘붉은 악마’가 중심에 있고 월드컵을 비즈니스의 호기로 활용하려는 자본의 욕망이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 승전보가 나올 때마다 주가가 더해가는 이방인 감독 히딩크가 더해진다. 그의 지도력은 대중의 외면을 받는 정치인들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 그 많은 국민을 광장으로 모이게 하고 열광하게 만든 건 축구공과 승전보가 아니라 열광하고자 하는 욕망, 무엇엔가 희망을 모으고 싶은 열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현대사회의 소외를 넘어 인간의 체온을 나누고 싶은 욕구였을까.

우리의 역사에서 이처럼 순수하게 기쁨을 얻기 위한 열정을, 그것도 한덩어리로 분출한 적이 있었던가. 정치란 어느 면에서 이런 국민들의 열정을 살려나가기 위한 제도적 장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의 정치는 국민들의 열정을 살려내기보다 살아나려는 열정조차 사그러들게 하는데 앞장 서 온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의 열정은 다시 우리의 현실 삶 속에서 되살아나야 한다. 각자의 일터에서 불꽃을

피워야 한다. 나아가 죽쑤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불타올라야 한다. 지금의 열망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정치인들이 맡을 몫이 바로 그런 열정을 불태우고 싶은 국민들의 열망을 모으고 담아내는 일일 것이다. 이 열정은 자칫 수구적 정치집단에 의해 파시즘으로 화할 위험도 있다. 적어도 역사적 경험에 비춰보면 그런 위험을 외면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열정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지를 정치인들에게만 맡기고 구경꾼이 될 생각은 말아야 한다.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만큼 국민대중도 스스로를 지켜낼 조직들을 꾸려나가야 한다. 크고 작은 조직들이 정치에 요구하고 감시하는 역할들을 맡아야 정치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정치가 과연 희망을 줄 수 있는가 묻고 싶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희망이 될

가능성을 우리는 매우 미약하게나마 경험한 바 있다. 가깝게는 6·29선언을 이끌어낼 당시, 비록 전국민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렵지만 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서며 역사의 물꼬를 바꿨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보다 앞서 80년대의 살벌한 정국 속에서나마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유권자들의 손으로 젊은 학생운동 출신 국회의원들을 대거 등장시켰던 2·12 총선이 숨막히던 군부 독재의 기세를 꺾게 했던 기억도 있다.

정치에 한없이 실망하면서도 결국은 군부독재를 끝장내고 문민정부로, 또 선거혁명에 의한 최초의 정권교체로 한걸음 한걸음 정치를,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국민이었다. 이제도 우리 국민은 무언가 공유할 희망을 찾고 있다. 6·13 선거를 보이코트(?)한 그 국민들이 실상은 진정한 희망을 열망하는 이들임을 우리 정치가 바로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한순간 전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열정이 자칫 허무주의를 낳을 위험을 경계하며 이제는 정치가 국민의 희망이 돼줘야만 한다. 그리고 국민은 그런 정치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창조해낼 스스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지방선거는 지나갔지만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더 남았다.

홍승희/본지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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