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교생실습을 다녀왔다. 한달간 중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최근 이슈가 되는 ‘교실붕괴’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교실은 완전히 붕괴됐다. 역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무너져 버렸다. 사실 ‘만만한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떠들고 딴짓하고 조는 건 내가 중학생 때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땐 학생들이 어느 정도 스스로를 통제했다. 지금은 다르다. 학생들은 스스로를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수업시간이라 할 지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야 만다. 또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던 일은 끝장을 보고야 만다.

수업시간에 맨 뒷자리에 앉은 학생이 맨 앞에 앉은 학생에게 “나 화이트 좀 빌려줘”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친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제멋대로 교실 앞뒤를 휩쓸면서 돌아다니는 일이 예사고 수업시간에 옆 사람과 혹은 옆 분단에 앉은 학생과 지우개, 연필, 우산, 필통등을 던지면서 ‘당당하게’ 장난친다. 교실 전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제멋대로인 데다가 학생들 스스로가 통제하려는 의지가 없으니 교사가 이 ‘난장판’을 수습할 재간이 없다.

학생들은 학교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의욕도, 긴장감도 없다. 수업시간은 교사의 통제영역을 넘어설 정도로 제멋대로인 무정부상태다. 부르디외는 그의 <학교론>에서 “전 교육과정이 의무교육화되면서 학교는 학생들에게 누구나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학생들은 자신이 일류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고 그저 아무런 신념없이 학업과정에 끌려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아무런 긴장감없이 제멋대로인 근본적인 이유는 부르디외가 이야기하듯 전 교육과정의 ‘의무교육화’에 있다고 본다. 학생들은 어찌됐든 아무런 선발절차없이 지금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진급한다. 또 지금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면 어찌됐든 고등학교까지는 진학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일류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학생은 거의 없다. 학교는 일방적으로 ‘공부 열심히 하면 앞날이 보장된다’고 말하지만 그걸 곧이 듣는 학생은 거의 없다. 그저 학생들은 집에서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해 학교에 와서는 아무 생각없이, 아무 의욕없이 교실에 들어앉아 있을 뿐이다.

부르디외는 <학교론>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이제 검소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어깨에 책가방을 멘 채 교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학교에 가던 서민가정 자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던 시대는 끝났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에 대해 학부모들이 애정과 신뢰의 태도를 보여주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리고 학생이 교사와 학교와 맺고 있던 관계는 이제 소원한 관계로 대치되고 말았다.

이들의 체념은 교사들에게 도전하는 수많은 제스처들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교실에서까지 버젓이 꺼내 놓고 듣는 워크맨이라든가 유행하는 록 그룹들의 이름을 볼펜이나 사인펜으로 가득히 써넣은 헐렁한 티셔츠 차림 등은 그들의 진짜 생활이 실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이 결론은 비록 프랑스의 이야기지만 한국의 학교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학생들은 무기력하고 매사가 제멋대로이며 학교 역시 이런 교실붕괴에 무방비상태다. 이런 ‘무너져 버린 교육현실’ 앞에서 과연 교사의 역할은 어떻해야 할까? 미래 교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숙제다.

정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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