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방지법은 야만? <말>지 6월호를 보고

여기 <말>지 6월호가 있다. 표지 하단에는 ‘도전이슈: 성매매방지법은 야만이다’라는 제호가 꽤 큼직한 크기로 박혀있다. 주변의 다른 제호보다 굵은 글씨체라 한 눈에 들어온다. 목차를 넘기면 ‘논쟁적 문제제기: 성매매방지법은 반인권적 악법이다’라는 글씨가 굵은 테까지 두른 채 시선을 유혹하고 있다.

“궁금하지? 읽고 싶지? 사고 싶지?”라고 아주 대놓고 꼬드기는 말지의 속삭임. 그러나 넘어가지 말자. 만약 그 기사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이라면 서점에 서서 읽어도 된다. 딱 네 페이지 뿐이다. 그리고 한 단락만 읽어도 알게 된다. 지독히 선정적으로 포장된 그 기사가 얼마나 조악하고 오만한 글인지를.

필자 최병천씨는 여성단체/기혼여성과 매춘여성간의 대립구도를 교묘히 설정하고 자신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진보주의자로서’ 매춘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겠노라 말한다. 그는 감금, 폭행, 협박, 불법적 채무관계와 마약 등으로 성매매된 여성은 전체 매춘여성의 5%에 불과하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선택하는 여성이 전체 매춘여성의 95%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 95%의 ‘자발적 성매매’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권력을 가진 대다수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판단이 반영된 풍속의 문제에 불과”하다고도 주장한다.

그리고 성매매방지법을 금주법에 비교하며 자발적 쌍방거래를 법으로 금지하면 더 큰 부패가 양산될 뿐이라고 경고(?)한다. 비록 그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 - 매춘여성의 완전 비범죄화 등에는 나 역시 일정부분 찬성하지만 그가 결론으로 가기 위해 이끌어내는 말들은 어이없다 못해 쓴웃음이 나올 정도다.

나는 지금 그 글에 대해 길게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발적인 성매매란 얼마나 허구적인 말인지, 그리고 한국 성매매의 현실이 얼마나 여성의 몸과 혼을 유린하는지 이제껏 해온 말로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글의 필자에게는 왜 성매매는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 말하는지에 대해 잠시라도 고민해보기를 주문할 뿐이다.(물론 그가 진심으로 고민할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서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이런 기사를 ‘띄어주는’ 말지의 태도다. 선정성에 눈이 멀어 여성주의자들을 괜한 미끼로 삼는 일이야 요즘의 한 유행인 듯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아무리 ‘논쟁을 위한 논쟁’을 원한다 하더라도 논쟁거리가 될만한 최소한의 합리성은 갖춘 글을 찾아오길 바란다. 성매매 반대의 목소리가 기존의 도덕적 잣대에 의한 것인양 가정하고 쓰는 글은 명백히 말해 해악이다.

성매매 반대를 위해 노력하는 여성단체들을 ‘인습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부르주아 중산층 기혼여성들의 집단으로 교묘히 몰아가는 글은 그 어리석음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런데 말지는 이 위험에 제동을 걸기는 커녕 오히려 글의 편견에 기막히게 잘 부합하는 자료사진을 붙여줌으로써 공범의 역할을 수행한다.(‘장소: 천호동 현대백화점 앞’이 써있는 플랭카드와 ‘성매매를 근절하여 건강한 가정을 지키자’라는 팻말이 있는 집회사진이라니. 그 사

진 선정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난 5월호 말지에 비교적 꼼꼼한 성매매 현장 르포기사가 실렸다는 점이다. 말지는 ‘성매매는 거래도 노동도 아니고 다만 폭력일 뿐’이라는 목소리를 내보낸 바로 다음호에 순진한 척 ‘자발적 쌍방거래’ 운운하는 글을 실은 것이다. 그리하여 성매매 근절을 위한 생생한 목소리는 무시되고 사라진다. 마치 벽에 대고 소리친 것처럼 반향없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말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말>지여, 선정주의에 휘말려 우리의 말들을 무력하게 하지 말아다오. 그것이 ‘진보적 시사종합지’에 거는 소박한 바람이다. 그리고 여성운동은 당신네들이 때때로 건드리기 좋은 자극적인 소재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요구한다.

홍문 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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