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 달러 호텔

60년대 독일, 대학가를 메우던 정치적 구호가 하늘을 찌를 듯 높고 날카롭던 시절 동료학우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마다 않고 데모행렬을 비껴지나 헐리우드 B급 영화의 매혹에 사로잡히곤 하던 그에게는 나름대로 ‘세상 구원’ (혹은 ‘구원된 세상’)에 대한 견해가 있어 왔다.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일관성보다는 시네마틱한 쾌락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그리고 음악에 대한 섬세한 직관력을 지니고 있는 그는 언제나 정갈한 색과 소리의 조형으로 관객의 감각지평을 확장시켜주곤 했다. 부드러워지고 넓어진, 세밀해지고 깊숙해진 감각인지능력이라면 폐허 속에 남겨진 사람들도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사람들이 다시 사랑을 시작하면 세상은 다시 은은한 변용의 빛에 휩싸일 테지 - 이것이 그가 선택한 옵션이다. 때로 그의 선택은 진정 눈부신 날개가 되어 모든 상실된, 조각난 마음을 다 실어 나를 것 같기도 하다. 예컨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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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감독으로서의 그의 이름 ‘빔 벤더스’는 이 영화에 와서 가장 확실하게, 가장 독특한 문양으로 아로새겨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묘한, 다양한 방식으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모방하고 있는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은 관객을 (특히 벤더스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영락의 알레고리 그 자체처럼 남루한 몰골로 서 있는, 그러면서 이마에는 아직도 ‘밀리언 달러 호텔’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는 L.A.의 저 거대한 호텔, 그 안에 기숙하고 있는 한 무리의 ‘백치들’. 베를린의 ‘승리의 여신상’이 아닌 L.A.의 이 호텔 지붕에 내려앉은 천사의 시선은 처음부터 너무 한 방향으로 고정돼 있다.

내면에 일그러진 자화상 하나씩 품고 있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 이 모토에 따라 소위 ‘지체아’ 톰톰의 내면 속에 숨어 든 천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정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가는 길이 너무 뻔하므로, 그 들려줄 메시지가 너무 분명하므로 초반부터 초조하고 불안하다. ‘광기의 역사’는 물론 아직도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의 비정상성을 들춰내기 위해 혹은 비정상 속에 더 풍부하게, 더 순수하게 깃들여 있을 정상성을 퍼 올리기 위해 이렇듯 ‘비정상적인 기이한 사람들’을 동원시키는 방식은 그것이 여전히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적 경계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문제적이며 정상/비정상 ‘너머’라는 어떤 본질주의적 세계를 구원의 지평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고 상투적이다.

밀라 요보비치, 멜 깁슨, 제레미 데이비스 등 몇몇 등장인물들의 성공적인 연기, 가끔씩 눈을 시리게 할 정도로 환상적인 매혹의 장면들, 군소리가 필요없는 U2의 음악 - 이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한 셈 일 테지만, 그래도, 그래도 ‘세상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또한 기술의 발전 못지 않게 조금씩 발전해야 되는 것 아닐까.

김영옥/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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