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여신축제

여신은 우리 삶과 우리 세계 곳곳에 내재한다. 모든 존재는 여신과 동떨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여신의 일부이다. 오늘날 여신은 신음하는 지구, 우리의 어머니이신 대지로 묘사된다. 그리고 우리들 영혼 속에 질식할 듯 숨죽이고 있는 거룩한 신성으로 묘사된다. 이들을 살려내는 상징적인 예식이 지구의 새로운 제례가 되고 있다.

- <깨어나는 女神>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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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여신축제’의 전야제, 생명콘서트가 열리는 경동교회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거울이 놓여있고 예의‘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한 계단씩 발걸음을 뗄 때마다 아담한 설치물과 함께 ‘여신의 십계명’이 적혀있다. 무지개빛 펑크가발 옆에는 ‘여신은 신나게 논다’는 계명이, 짓궂은 농담처럼 놓여있는 빨간 글러브 옆에는 ‘여신은 기, 끼, 깡이 넘친다’는 계명이 배치돼 있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의 거울에는 이렇게 써 있다.

‘그건 바로 당신!’

지난 25∼26일,‘우리 안의 여신을 찾아서-지리산 여신축제’는 이렇게 시작됐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이 주최한 이번 여신축제에는 여성신학자 현경, 명상음악가 제니퍼 베르자니, 제이미 시버를 비롯해 다양한 종교인, 여성노동자, 운동가, 문화예술인 등 총 121명의 ‘여신’들이 참가했다.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문인숙 씨는 “현경 교수의 책을 우연히 읽고 행사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고 참가이유를 밝혔다. 또한 살림이스트(명사‘살림’에서 온 말,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에코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살아가고픈 학생, “가장 섹시한 목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혀 웃음을 자아낸 여성종교인, 자연생명과 치유에 관심이 있는 산부인과 의사 등 다양한 참가자들이 ‘자기 안의 여신’을 발견하기 위해 함께 했다.

호주제 폐지 모임의 고은광순 씨는 “후천개벽의 때인 것 같습니다. 남성중심의 부권사회가 가고 어머니, 모성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운명적 예감을 느낍니다”라고 말하며 지리산 여신축제의 ‘필연적 귀결(?)’에 대해 설파했다.

이 행사의 공동 주재자인 현경 교수는 ‘왜 여신인가’에 대해 “상징은 사실보다 무서운 것이다. 대안적 모델로서의 ‘여신’을 말하는 것은 무의식의 층위를 건드리는 상징의 행위이다”라고 설명하며 “우리나라의 가장 모성적인 산인 지리산에서 여신제례를 통해 내 안에 있는 신의 빛을 발견하고 보살핌과 나눔의 종교성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더불어 ‘신’이 나게 놀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입수식 - 칠선 계곡의 아마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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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칠선계곡에서 제례가 한창이다. <사진·박영숙>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지리산 칠선계곡 능선을 따라 올라간 121명의 ‘여신’들. 강건한 바위들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계곡이 흡사 여성의 질 모양과 같다. 현경 교수가 전라의 몸으로 입수식 테이프를 끊자 하나둘씩 어색함을 깨고 옷을 훌훌 벗어던지며 계곡으로 흘러 들어갔다. 원시적 자연으로 돌아간 그들은 흡사 아마조네스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물기를 머금은 채 바위 위에 모여 앉아있는 그들은 그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억압과 상처를 씻어버리고 여성 몸에 대한 긍정성을 되찾아 평온한 원시의 상태로 돌아간 듯 했다. 한편 이 돌발적인 ‘여신’들의 축제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으니 삼림청 남자 직원 두 명과 지나가던 젊은 등산객이 등장,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신’들과 가벼운 실랑이가 일었던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리를 뜰 생각을 못하고 서서 긴급회의(?)를 하던 세 명의 남성은 결국 어쩔 줄 몰라하며 길을 우회해 하산했다.

우주의 원리에 따라 쏟아내고 공유하기

북소리가 흥을 돋구며 본격적인 여신축제가 시작됐다. 간단한 공연이 끝난 후 ‘지수화풍’의 원리에 따라 참가자들 스스로가 자기 안에 감춰 두었던 고민과 희망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지수화풍’은 우주의 원리다. 동쪽은 ‘바람(풍)’이며 꿈과 비젼, 희망을 의미한다. 서쪽은 ‘물(수)’이며 용서, 지혜를 의미하고 남쪽은 ‘불(화)’로써 정열, 섹슈얼리티, 혁명을 뜻한다. 북쪽은 ‘땅(지)’으로 몸,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각각의 원리에 따라 가슴속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공유, 극복하고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다. 카톨릭 신자인 한 참가자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축복해주지 않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여성은 신부가 될 수 없는 카톨릭의 교리에 대해 절망한다”고 소리쳤고 서강대 여성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조김현지 씨는 “교수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힘겹게 싸우고 있다. 가해 교수가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희망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신들’의 희망

기원문 낭독을 마치고 색색의 종이 위에 여신기행을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을 적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명상음악과 계곡의 물소리가 어우러진 가운데 참가자들은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각자의 소망을 적어내려 갔다. 힘겹게 저항하고 있는 싸움의 승리를 기원하기도 했고 조악한 현실을 벗어나는 에너지를 갈망하기도 했다. 제례의 끝에 각자의 소망이 담긴 종이를 나무에 매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산한 뒤 칠선계곡 입구에서 121명의 참가자들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만지면 모든 것이 변화하네”하는 은은한 읊조림이 계속되자 어느 순간 환한 보름달이 망설이듯 형체를 드러내다 산 그림자 위로 봉긋 솟아올랐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뒤따라 명상과 기도에 잠기는 시간이 이어졌다.

무박 이일의 다소 빠듯한 일정으로 진행된 행사 안에서도 참가자들은 진지한 얼굴로 ‘자기 안의 여신 찾기’에 몰입하는 듯 했다. “여신에 대한 고민과 체험이 막연해 실제적인 접근이 충분치 못했다” “빠듯한 일정 안에서 기획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등 아쉬움이 남기도 했지만 지리산의 기운을 한껏 받아 안은 ‘여신들’의 표정은 싱그럽기만 했다.

<문이 정민 기자 knnif@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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