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쉬어 가는 나무

신문사에 노오란 꽃봉투가 하나 날아들었다. 고이고이 담은 몇 장의 그림엽서와 예쁜 명함, 그리고 또박또박 적은 메모. “안녕하세요. 일러스트레이터 정경하입니다. 좋은 글과의 만남을 위해 제 그림엽서를 보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한 장의 그림이 눈에 띄었다. 나무 위에 빛 고운 여린 구름이 걸려 있는 모습. 그림 아래엔 이렇게 적혀 있다. <구름이 쉬어 가는 나무>. 한가로운 구름도 쉬어 갈 수 있는 나무라니. 그 나무 위에서 나도 쉬고 싶다. 누굴까. 이렇게 따뜻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인터뷰는 늘 호기심으로 시작된다. 스물다섯 일러스트레이터(삽화가) 정경하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녹색바람 부는 날

“마음속에 늘 무언가 꿈틀거려요.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더 예민해진 것 같기도 하고. 전엔 제가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거든요.”

@15-1.jpg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의상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러나 마음속엔 늘 그림이 있었다. 서점엘 가도 그림이 있는 책에 손이 갔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일러스트레이션(삽화) 공부를 시작했다. 오랜 소망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한 지금 그는 변했다. 사소한 느낌들, 사람들이 흔히 지나칠 만한 일에도 눈이 가고 마음이 간다. 바람도 달리 느껴진다. 바람에도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다. “사선으로 불어닥치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곁에서 뭉글뭉글 피어나는 바람”도 있다. 뭉글뭉글 피어나는 바람은 녹색빛이다. 그 바람은 정경하의 도화지 위에서 <녹색바람 부는 날(그림)>이 됐다. 그는 말했다. “그림을 시작한 지금은 아예 그림으로만 말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늘이 되어 줄께

정경하가 그림으로 건네는 메시지는 ‘쉼’이다. 그는 그림으로 넌지시 말한다. “우리 잠시 쉬어가요.”

~15-2.jpg

일상생활에 지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마음에도 항상 빈자리를 둔다. 그 빈자리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 여백이 되고 독자들에겐 ‘휴식’이 될 것이다. “삽화는 글을 보완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림 한 장으로도 충분히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요. 나중에는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을 펴내고 싶어요. 이건 모든 삽화가의 꿈이겠지요?” 말끝으로 물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피어난다.

생각하는 그림동화

@15-3.jpg

작년엔 샘터사에서 주최한 ‘정채봉의 <생각하는 동화> 그림 공모전’에서 “생각지도 못한” 동상을 받았다. 오랜 동안 가졌던 “샘터사에 대한 짝사랑”과 정채봉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서라는 취지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래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려서 좋은 결과가 있었나보다”라며 배시시 웃는다. 그렇지만 앞으론 공모전엔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림에 자꾸 욕심이 들어갈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정경하

정경하의 느릿느릿한 말투, 나른한 느낌은 그의 그림과 닮았다. “디지털보단 아날로그가 좋고 물감보단 파스텔이 좋다”는 그는 그림을 그릴 때도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직접 그린다. 색은 주로 파스텔을 손으로 문질러 입힌다. 이것이 맑고 따뜻한 느낌의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었다.

@15-4.jpg

그런 그의 믿음. “그림은 그리는 사람을 닮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제 그림이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려면 제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요.” 그래서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곧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란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맑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정말 맑은 사람이었다. 처음 짐작은 틀렸다. 정경하 그림의 비밀은 바로 ‘정경하 자신’이었다.

김지은 기자 luna@womennews.co.kr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