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본 제주신화<자청비·가믄장아기·백주또…>

흔히 신화라고 하면 대뜸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지만 한반도는 전 국토가 만신전이라 할 만큼 신으로 가득 찬 나라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는 1만8천 신이 있다고 하여 ‘신들의 고향’으로 불린다. 하지만 여신 비너스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우리나라의 여신 자청비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는 우리 신화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제주 여신들을 소개하는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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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내랏당무신도 중 상군위(제주대 박물관 소장)

신화연구가 김정숙씨가 쓴 <자청비·가믄장아기·백주또-제주섬, 신화 그리고 여성>은 여성의 눈으로 제주의 신화를 꼼꼼하게 읽고 현대적으로 해석한 책이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제주의 신화들은 1950년대 말부터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문자로 정리되기 시작했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미신 타파 정책으로 인해 서사의 형태로 채 기록되지도 못하고 많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몇몇 신화들은 굿이라는 의식을 통해 제주 사람들에게 구전돼 이어지고 있으며 이 책에 실린 신화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김정숙씨는 “제주도에는 약 350여 개의 당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당에 모시고 있는 신들 중의 80%가 여신이다”라고 밝히며 제주 신화에서 여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그 내용 또한 여신중심적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제주 신화에는 유독 여성신들의 출생담이 많다. 부부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 근심하다가 치성을 드리고 자식을 얻는데 이때 태어나는 아이는 대체로 딸이며 딸이어도 섭섭하지 않다. 이는 제주도의 척박한 환경과 결부지어 여성의 경제력과 이로 인한 여성의 위치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필요에 따라 남장을 해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를 오가며 사랑과 운명을 쟁취하는 사랑과 농경의 여신 ‘자청비’, 자신에게 주어진 가부장적인 운명을 거부하며 전도된 가치들에 저항하는 운명의 여신 ‘가믄장아기’, 수렵신인 남편에게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을 분산’하자며 나와 마을을 세운 여신 ‘백주또’. 또한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못한채 누구의 딸 혹은 누구의 아내로 불리는 많은 여신들.

김정숙씨는 제주무속신화 속에서 찾아낸 이 여신들에게 오늘날 제주 여성들의 모습을 투영하며 생기를 불어넣는다. “수십권 이상 쏟아져 나오는 그리스 신화에 비추어 하찮은 것으로 무시당해온 제주 신화를 가지고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늘 배제당했던 여성들을 통해 새롭고 다른 모습과 관계를 찾고 싶었다”는 저자의 바람대로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 여신들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이 생겨난다. 내 속의 여신은 누구일까.

김정숙 지음/1만원/각

이정주 기자 jena21@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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