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지금 여왕 모후의 서거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하지만 그 들썩거림이 다이애나가 저 세상에 갔을 때 보여주었던 집단적이고 히스테리컬한 상실감이나 9·11테러에 희생당한 영국인들의 죽음 앞에서 보여주었던 깊은 슬픔은 아니었다.

언론, 다우닝가와 의회 그리고 거리를 가득 메운 참배객을 보면 분명 들썩거린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건 분명히 1백년하고도 두해를 더 산 인정 넘치고 존경스런 할머니를 보내는 조용하지만 약간은 축제같은, 그리고 경건하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볼 수 없는 그런 묘한 들썩거림이었다. 여왕 모후의 삶과 그가 영국민에게 보여주었던 따스한 미소를 이해한다면 이런 반응이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00년 8월 4일 여왕 모후는 엘리자베스 안젤라 마거릿트 보우웨스 리옹(Lady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이라는 다소 긴 이름을 가지고 스코트랜드 세인트폴의 왈든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살에 27살의 알버트 왕자와 결혼했다. 여왕 모후는 왕자의 청혼을 두번이나 거절하고 세번째에 수락했다. 엘리자베스는 왕실의 화려한 생활보다 평범하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엘리자베스는 왕자와 결혼하자마자 특유의 따뜻한 미소와 격식을 따지지 않는 친근함으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그는 공식석상에 나타나면 아무리 주위 분위기가 시장골목처럼 어수선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관심과 미소를 보냈다고 한다. 또 매년 이튼스쿨을 방문하여 어린 학생들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학생들의 공연을 관람한 후 무대 뒤의 스태프와 수위까지도 챙겨가며 인사했다고 한다.

따뜻한 품성뿐만 아니라 그의 강인함 역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에드워드 황태자가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져 왕위를 포기하게 되자 1936년 12월 알버트 왕자는 조지5세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알버트와 엘리자베스 부부는 왕위계승자로 준비를 해 오지도 않았다.

알버트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이며 유약한 성격인데 왕위에 오르자 곧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이 와중에서 이 부부가 대영제국의 왕과 왕비로 착실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헌신적인 지지와 폭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녀의 강인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40년 9월의 대공습으로 버킹엄 궁이 폭격당했을 때 그는 “궁이 폭격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 이스트 엔드(East End: 런던시 동부, 예전 빈민가. 2차대전 중 공습으로 피해를 받았던 지역)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며 폭격 당한 지역을 둘러보고 국민들과 아픔을 같이 했다.

전쟁 중 대부분의 귀족과 부자들이 자식들을 북미지역에 보냈을 때 그는 단호히 “아이들은 내가 떠나지 않는 한 영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떠나지 않는 이상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어떤 상황에서도 영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소, 강인함, 그리고 증손자들(윌리엄과 해리왕자)과 가수 앨리 지(Ali G)의 손동작을 같이 했다는 여유와 유머를 가졌던 한 할머니의 죽음에 영국민들은 한없는 사랑과 존경을 마지막까지도 보내고 있다. 7일 현재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일반 참배객들이 2킬로미터 이상 되는 줄을 서서 10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다. 영국 근대사를 이끌며 영국을 결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불독같은 성질의 처칠 수상과 엘리자베스 여왕 모후의 미소였다는 신문 기사를 완전히 이해하는 하루였다.

이주영/ 영국 통신원 영국 에식스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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