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기녀는 여악(女樂)이라 하여 가무를 특기로 하고 궁중이나 사

족의 연회에 동원돼 흥을 돋구는 일을 업으로 삼는 여성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의약이나 침선의 기술에 필요한 인원을 기녀중에서 선

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특별한 기능을 가진 여성이라 하여 기녀

(妓女) 또는 기생(妓生)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또한 그 별칭으로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懈語花)라고도 하였으며, 여러 기

녀들이 춤을 출 때 ‘지화자(持花者)’라고 복창하는데 그것은 기생

이 꽃을 쥐고 춤추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기녀들은 제도적으로는 관청에 소속되었고 신분상으로는 천민에 속

하였다. 내외법이 존재하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된 하층 신분의 계층이었고 또한 젊고 미모를 지녔기 때문에 점

차 시대가 내려올수록 기녀는 기능직의 여성이라기 보다는 사대부나

변방 군사들의 위안부로서, 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역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녀라고 불리우는 여성들을 남자

들의 노리개로서 창기(娼妓)와 대등한 개념으로 국한시켜 생각하게

되는 의미상의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연산군 때 전성기,대궐도 출입

조선시대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기녀에 대한 폐지

논의는 초기부터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즉, 창

기는 관청의 소유이므로 이를 범하여도 무방한데 만약 창기를 없애

면 일반 가정의 여자를 범하게 되어 훌륭한 인재들이 벌을 받게 될

것이라며 많은 사대부들이 기녀 폐지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또한 북

방 변방에 주둔하는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기녀

를 폐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 “3년 마다

기녀 1백50명을 뽑아올린다”는 조항에서 볼 수 있듯이 기녀제도는

존속되었으며 오히려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기녀의 전성시대는 연산군 시대였다. 기녀를 운평(運平)이라고 개명

하였고 대궐안에 들어오는 자를 흥청(興淸) 또는 계평(繼平), 속홍

(續紅)이라고 하고 임금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기녀를 지과흥청(地

科興淸)이라고 하고, 특히 임금의 총애를 받는 기녀를 천과흥청(天科

興淸)이라고 구분하여 불렀다.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라는

관직을 두어 각도에서 재색을 갖춘 어린 소녀들을 뽑아올려 궁증에

두었는데 백여 명으로 시작하여서 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비용은 전국의 농민과 수공업자들에게 징발하여 그 폐단이 극심하였

다.

이러한 기녀들에게도 남편이 있었을까? ‘기생서방 같은 팔자’,

‘기생 오라비같이 생겼다’느니 하는 비유에서 기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기녀에게 일정한 남편을 허용한 것은 조선조 중엽 이후부

터였다. 이것은 기녀를 남편과 묶어놓으면 기녀를 보다 철저하게 파

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기녀의 생계가 보다 안정될 수 있

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기부의 사회적 신분은 특별한 경우를 제

외하고는 대체로 천인 계층에 속하였다.

황진이, 이매창, 논개,계월향, 만향 등 명성 높아

조선조 때 관기의 경우 30이 넘으면 뒷전으로 물러나 노동을 해야

하였다. 관기들은 물러나면서 조카나 딸을 대신 들여 놓아야 했다.

이것을 ‘대비정속(代婢政屬)’이라 하는데, 이들은 평생 기안(妓案)

에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빠져나오려면 속신(贖身)을 해야 했던 것이

다.

안동기녀들은 대학, 함경도 기녀들은 용비어천가등에 능통

동기의 교육과정은 엄격하여 15세에 기안에 올라, 음률을 익히고

춤을 배우며 재주 있는 기녀는 서화도 익혔다. 세종실록에 보면 관

기의 교육기간은 해마다 2월부터 4월까지, 8월부터 10월까지로 격일

로 진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녀들은 가무와 당비파는 필수 과

목이었고 그외 전공 악기를 한가지씩 학습하였다.

명기(名妓)로서 알려진 조선조 중종 때 송도의 황진이는 타고난 미

모와 시와 노래와 기지로써 송도 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황진이의 미모는 높은 수양을 쌓았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

의 도심(道心)을 흔들어 놓았으며 그 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

에서 읊어지고 있다. 광해군 때 부안의 이매창은 시인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그들 역시 지방관아에 매여 있었으나 이름난 선비들과의

접촉은 많은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충절로써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긴 기녀들도 있다. 임진왜

란 때에 진주 기생 논개와 평양 기녀 계월향은 자기 몸을 희생함으

로써 일본인 장수를 살해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또한 기녀 출신

김섬과 애향은 각각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 첨사 정발의 첩으

로 모두 몸을 피하지 않고 남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적진에 뛰어

들어 순절하였다. 이밖에도 함흥 기녀 만향과 같이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효부로서 이름을 낸 기녀들도 있었다. 반대로 기녀의 술책

에 말려들어 패가망신한 남자들의 일화도 많이 알려지고 있다. 돈

많은 상인들이 기녀와 사귀어 동거생활을 하다가 재산을 탕진하여

쫓겨나기도 하고 갈곳 없는 신세가 되면 바로 그 기녀 집의 하인으

로서 비참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기녀로서 자기와 사귀는 남자의

가산을 탕진시키지 못하면 명기가 아니라는 말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통 가무 시가문학 전승으로 예술보존자 돼

한편 기녀들에게도 특권이 있다. 즉 의식에 궁하지 않다는 것, 더욱

이 양반 부녀라야 입을 수 있는 비단 옷과 노리개까지 찰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경국대전'에 창기에게도 금은보석의 수식과 능라비단의

의복치장을 허용하는 대목이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남성들을 즐겁

게 해주기 위한 꽃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했다. 기녀들의 그같은 호사

는 본인에게만 한정되어 있지않고 친정가솔을 먹여살릴 수 있었다는

데서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딸을

기생으로 팔고 호강을 누리려는 야박한 부정에 의한 희생도 있었다.

이외에도 기생들이 내외법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어느 곳이나 출

입할 수 있었는데 이것도 이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라면 특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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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녀들은 자기가 거주하는 지방의 문화적 정서를 바탕으로

특기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첫째, 안동 지방의 기녀들은 유학경전인

'대학'을 곧잘 읊었다. 안동이 예로부터 전통적인 교육도시라는 데

연유한 것이다. 둘째, 관동의 강원도 지방의 기녀들은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을 즐겨 불렀다. 관동지방의 명승고적을 묘사하여

자기지방을 선전하는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셋째, 함경도 영흥지방

의 기녀는 ‘용비어천가’를 즐겨 읊었다. 영흥이 태조 이성계 선대

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넷째, 평양지방의 기녀들은 정조때 시인 신

광수가 지은‘관산융마’라는 시를 많이 읊었다. 다섯째, 제주기녀,

의주기녀, 북청기녀 들은 말을 잘 타기로 유명하였다. 특히 의주기녀

들은 검무에도 능통하였다.

기녀들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의 사치노예였으나 이들에 의해

전통적인 가무와 시가문학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온 부분도 많았음

을 볼 때 그들의 예술 보존자로서의 역할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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