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여성인력 기용

지난 3월 20일 국민은행이 31명의 여성지점장을 발령하자 각 언론은 일제히 ‘여성인력에 대한 과감한 발탁인사’라고 보도했다. 대체로는 은행권 내에서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청신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홍보 효과를 노려 여성인력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은행권 내에서는 이번 인사가 설사 일회용 이벤트로 그친다 하더라도 여성의 파이를 늘리는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의 시선이 나오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국민은행의 이번 인사는 지금까지 은행권의 관행으로 볼 때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것만은 분명 사실이다. 국민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 이번 지점장 발령은 공모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번에 지점장 발령을 받은 31명의 여성이 모두 지점장 신청을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종 결정 과정에서 행장이 추가로 인원을 차출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미처 준비가 안된 사람이 나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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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들의 파격적 인사가 여성들에게는 그리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고른 업무 배치등 여성 인재를 키우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진·민원기 기자>

또한 이번 인사는 주택은행과 통합과정에서 아직 지점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인사다. 따라서 전산통합이 마무리될 예정인 추석 즈음에는 이번 여성 지점장들이 나가게 된 지점 가운데 없어지는 곳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국민은행 ㅅ과장은 대부분 소매영업만 하는 점포가 지점 통합과정에서 정리대상에 들 확률이 많다고 전망한다. 그런데 국민은행 인사팀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번에 발령받은 여성 지점장 대부분은 소매금융 위주의 지점으로 발령받았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지점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며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에 발령받은 여성지점장들은 행운아로만 보기 어려워진다. 고용불안까지 함께 안고 가는 셈이기 때문이다.

보통 지점장으로 나갔다가도 실적이 좋지 않으면 다시 후선업무로 돌아오게 되는데 예전과 같은 업무로 돌아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은행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전한다. 오히려 근무수명이 앞당겨지기 때문에 되도록 안정된 근무를 원한다면 지점장을 안나가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이쯤되면 국민은행이 이번 조직개편 이후 2만여명의 직원들이 술렁이고 있다는 ㅅ과장의 얘기는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지점장 차출이 오히려 수명을 단축시키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행에서 지점장의 비중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져 가고 있다.

한 여성경제학자는 이와 관련해 세계경제 흐름이 자본시장 중심으로 흐르기 때문에 소매금융 위주의 은행은 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간다고 설명한다. 즉, 이제는 더 이상 개인금융자산의 형태가 예`적금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는 지점장으로 발령받으면 영전을 축하받았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위로주를 사주는 풍경도 벌어진다고 은행원들은 말한다.

지점장 발령이 반드시 앞으로 은행권에서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청신호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는 은행권의 구조적 문제 외에 여성들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문제점들도 포함돼 있다.

여성지점장은 대부분 소매금융지점을 맡고 있다, 업무 순환은 여전히 남성에 비해 다양화되지 않고 편중되어 있다, 승진시험에 통과하고도 5∼6년씩 진급을 기다리는 적체 인원이 많다, 여성 스스로 도전의식을 키울 수 있는 상위직 여성 모델이 없다 등등. 위계질서와 연공서열이 아직도 엄격한 은행조직에서 여성이 커나가기에는 아직 한계가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국민은행을 비롯한 대부분의 은행에서 여성지점장들은 거의 기업금융보다는 소매금융지점을 맡고 있다. 본점 근무 중인 여행원들 중에도 기업금융, 종합기획, 재무관리 등 금융업무의 핵심에 진입해 있는 여성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소매금융업무 경험만 갖고 은행 내에서 수직 상승하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은행원들은 입을 모은다.

ㅅ은행에 근무했던 박모씨는 상고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여행원들로서는 어차피 수직상승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시작이 문제라는 것이다. 여신이나 수출입 등의 업무 경험이 기업금융 전문 점포로 나가거나 승진을 하는데 기회를 보다 많이 제공하지만 여성들은 시작부터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박씨에 따르면 여성들은 기껏해야 환전 정도의 업무를 담당할 뿐이다.

ㅎ은행에 근무했던 이모씨는 90년대 초반 신입 여사원 중에 국내 최고 대학 출신이 한 명 있었는데 결국 은행 업무가 아닌 부설 경제연구소로 발령을 냈던 일을 얘기한다. 은행 내부에서 그 여성을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ㅎ은행의 최모씨는 요즘은 여성에게도 초우량 VIP고객을 상대하거나 투자개발, 기업금융업무의 기회가 열려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대졸직원을 뽑을 때도 차별없이 희망직에 따라 대부분 발령을 낸다고 한다. 그러나 기업금융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아무래도 적은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기회가 열려있는데 여성들은 왜 가지 않는냐는 질문에 최모씨는 선배여성들이 없었기 때문에 선뜻 도전하는 여성이 없고 진취적인 분야에 도전하려는 마인드도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은행에 방문하는 사람이 첫 대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창구 여직원들이기 때문에 흔히들 은행은 여성들이 많은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 여성국 김해숙 부장에 따르면 은행권 여성직원들의 80%가 창구 업무자이고 10%가 책임자, 나머지는 창구업무를 보면서 책임자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국민은행이 여성지점장을 대거 발탁했다고는 하지만 전체 1천100여개의 점포에 비하면 총 56명.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은행업무 10년차인 김모씨는 호봉에서도 차별받지 않고 지점장이나 행장과 대화시간에도 늘 여성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근무하는 지점에 24명의 총 직원 중 책임자 6명이 모두 남성이었다.

20여년간 은행에서 근무한 강모씨는 본인의 경우 남성동료에 비해 3년 정도 승진이 늦은 것이며 현재 91명의 책임자급(3,4급 대리급 과장) 남성 중 여성은 4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나마 60년생 이후로는 직무연수의 기회도 열려있었지만 초창기 은행 근무시절 자신은 연수기회 조차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여신이나 외환부분에는 아예 여성을 앉히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강모씨는 이번 국민은행 인사에 대해 변신에는 성공했지만 두고 볼 일이라고 일축했다. 남

성 승진자에 비해 아직까지 여성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는 은행 내부 분위기상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 남성직원과 갈등도 뻔히 예상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단지 등 주택가에 위치한 지점들의 경우 경쟁력이 얼마나 있을까는 의문이라고 부정적 전망을 내린다.

국민은행의 이번 인사가 있기 전에도 최근 2∼3년 새 시중은행들이 여성에 대해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사례들은 있다. 작년 4월 제일은행은 ‘고객 위주의 경영과 대고객 서비스 강화를 지원한다’는 측면에서 여성인력을 대거 승진시켰고 여성 CEO 전담 기업금융지점장을 신설하기도 했다. 그 전 해에도 30%의 여성인력을 승진시켰다.

조흥은행도 99년 기존의 연공서열식 인사벽을 깬다며 총 7명의 여성지점장을 탄생시켰다.

당시 남자들도 3급 차장 승진 후 2년의 경력이 있어야 지점장으로 발령받는 관행을 깨고 여성에 대해 3급 승진과 동시에 점포장으로 발령을 낸 것이다. 산업은행도 99년 첫 여성지점장을 배출했다.

문제는 이제부터일 수 있다. 은행들이 여성인재를 키우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기 보다 사회분위기에 편승, 이목을 끌려는 반짝 이벤트로 일관한다는 의혹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행보를 두고 봐야 알 일이기 때문이다.

박정 희경 기자 chkyung@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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