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남성동지들에게 항의했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여성 다섯 명의 삶을 담은 연구논문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 여성학 협동과정 최기자씨는 석사학위 논문 <여성주의 역사쓰기를 위한 여성 ‘빨치산’ 구술 생애사 연구>에서 지금껏 문학작품이나 역사서술에서 소외돼 왔던 여성빨치산의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던 근대 한국사회에서 여성빨치산들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 형제, 남편 등 정치의식을 가진 가족들의 영향이 컸다. 이렇게 정치의 장에 나온 여성들은 교육을 통해 여성이 놓인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들은 해방 직후 남로당 소속 민주여성동맹에 가입해 활동영역을 넓히며 ‘문맹퇴치 등 여성대중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남성동지에 대한 교육’도 병행했다. 여성 빨치산들은 자신의 어머니나 부인이 가정을 지키기를 바라는 남성동지들에게 “당신네들 어머니나 부인은 왜 안 나오는가. 딴 사람들은 다 와서 이렇게 땀흘리고 (있는데) 당신네 부인은 집에서 밥이나 해먹고, 되겠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씨는 남성들과 달리 이들에게는 모성이 갈등요인이자 활동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고 분석한다. “애기가 생겨나니까 ‘그래 이 계급은 타파해야 돼. 이 후손을 위해서 나도 나가야 돼’…그래 니가 젖 안 먹고 클 수만 있어라. 그때만 기달린 거야…그러고 두고는 인자 동지들 만나러 가는 거지. 가다 들은께 (애기가) 막 울어…그냥 갔어. (시부모님께) 애는 좀 키워 달라고…기양 (산으로) 올라왔어요.”

입산 초기 여성빨치산들에게 산 생활은 해방이었다. 이들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보람있게 살았어요. 아조 큰 포부는 그대로 갖고 걍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허고 다녔으니까”라고 회상하거나 “여자이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없었어요. 왜냐면 너무 우리가 억압당하고 살았잖아”라고 말한다.

빨치산들의 산 생활은 평등을 추구했지만 봉건적 잔재를 털어 버리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여성들은 강력히 저항했다. “빨치산에 가서도 대부분 식사하고 그런 거 하는 걸 여자들이 허는 걸로 의례히 알아. 나는 ‘절대로 안 된다’ 그래. 왜냐믄 그러믄 우리는 공부를 못 허잖애. 물론 나한테 손해재. 저 여자 억세 빠졌다고. 그런 소릴 듣고 그러재.”

포로수용소, 감옥에서의 비인간적 경험은 이들에게 육체적 고통과 함께 동지애의 상실 등 정신적 고립감을 안겨 주었다. 이들은 전향 강요와 이에 응하지 않았을 때 뒤따르는 폭력과 고문, ‘자고 일어나면 얼음꽃이 피어 있는’ 독방생활을 모두 견뎌냈다.

사회로 나오자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거제한, 보안관찰, 가난의 악순환과 병고였다. 조직이 와해된 상태에서 ‘동지결혼’을 통해 새로운 관계망을 구성했으나 가난, 연좌제, 질병 등 이들의 경험은 자식들에게 대물림됐다.

1987년 이후 이들은 다시 집단활동을 시작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박모씨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았어. 여성문제하고 농촌문제”라고 말하며 “청년단체 조직허는데 가보니까 사실 지금 청년단체에 여자가 젤 많애. 남자는 아주 쪼금이야. 그런디 거 가본께 간부가 짝 있는디 딱 여자 둘이더라, 간부가. 근께 언제든지 말야 중요헌 것은 주도권이야”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인터뷰를 간 최씨에게 ‘여성학 공부를 함께 하자’는 요청을 할 만큼 여전히 이론 무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최씨는 이 연구가 역사속의 개인의 경험과 연구자의 시각이 함께 녹아 들어간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 5명의 여성들과 접촉하는 과정 그리고 이들이 침묵을 강요당해 온 데다 피해의식이 커 연구에 어려움을 겪은 상황을 모두 소개했다.

송안 은아 기자sea@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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