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XX랑 연애했어?”

“안 했어요.”

서울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장명숙 소장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경아(가명)는 “연애(경아가 성폭력을 지칭하는 용어)했어요”라고 수십 번도 넘게 또렷하게 말했었다. 그런데 낯선 사람(판사) 앞에 서자 “안 했다”고 하는 것이다.

1999년 같은 동네에 살던 이모씨를 비롯한 4명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해 온 경아(당시 14세·정신지체 2급)는 1심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10차례나 법정에 서야 했다. 그 과정에서 경아는 가해자 이씨의 성기에 점이 있고 발가락 2개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진술하는 등 명확한 증거를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연애 안 했어요”라는 한 마디에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했다면서 주범 이씨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선고했다.

작년에 진행되었던 2심 재판은 달랐다. 상담소는 재판부에 동석요청뿐 아니라 피해자를 판사실이나 검사실에 데려가 따로 심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가해자와 가해자의 변호사, 방청인들이 있는 재판정은 경아가 견뎌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법적으로 상담소 측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판사 개인의 결정에 따라’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성폭력사안 육하원칙에 따른 일관된 진술 요구 무리

미숙한 피해자 몰아붙이는 반인권적 재판과정이 문제

그러나 판사실에서 경아는 다시금 진술을 번복했다. “연애 안 했어요.” 지금까지 경아의 상담과 법적 지원을 맡아왔던 장명숙 소장은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피해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판·검사들 앞에서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뜻밖에도 부장판사(구욱서)는 이렇게 물었다.

“경아가 말하는 ‘연애’가 뭐야?”

그러자 경아는 장 소장에게 창피하다는 눈짓을 보내며 말 안 하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글씨 쓸 줄 알아?”

“네.”

“나만 볼게. 여기 종이에다가 적어봐.”

경아가 적은 글자는 ‘옷 벗고 이불 덮는 거’였다.

“이XX랑 옷 벗고 이불 덮었어?”

“네.”

작년 9월 1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해서 피해자의 진술을 받아들여 성폭행범 이모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4명의 가해자 중 2명이 상고했지만 최근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장애인성폭력상담소 측은 “재판과정에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았는지 모른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입도 떨어지지 않는 경아에게 법원은 10번에 걸쳐 일관된 진술을 요구했다. 경아에게 있어서 ‘말하면 죽여버린다’는 가해자의 한 마디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 기억이 떠오르면 진술을 번복했다. 1년 넘게 끌었던 재판과정에서 경아는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자신의 편인지, 나쁜 아저씨(가해자)의 편인지조차 확실히 알지 못했다.

최근 급격하게 상담요청이 증가하고 있는 유아성폭력 사건의 법적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측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

“정신지체 장애인과 유아는 인지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에 진술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날짜와 시간개념이 별로 없고 사건정황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억을 하지 못하죠. 지속적인 피해를 당하는 경우에도 앞뒤 순서를 혼동하기 때문에 오로지 진술에만 의지해야 하는 성폭력 사건 소송에서 매우 불리합니다.”

하은주 상담부 부장은 “재판부에선 육하원칙에 따라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진술할 것을 요구하는데 아이들이 거기에 맞춘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 사건에선 시간을 대라고 하니까 아이가 8시 40분 경이라고 말했는데 가해자가 그 시각에 패스카드를 쓴 기록이 있는 거예요. 버스를 타고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생긴 거죠. 가해자가 연두색 옷을 입었는지 노란색 옷을 입었는지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는데 모르겠다고 하거나 잘못 대답하면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고 증거불충분이 되죠.”

상담단체들은 “법이 상정하는 인간은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남성 기준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정신지체 장애인, 그리고 미숙한 피해자들은 법으로 구제 받을 수가 없다”며 ‘과연 법이 공정한가’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법원이 아이의 진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 보호 관

점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하기에 역부족인 어린 피해자들은 수사과정에서나 법정에 섰을 때 사실을 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진술을 여러 차례 반복할수록 심리적인 쇼크도 커져서 2차 3차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라고, 정신지체라고 진실을 얘기 못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마다 인지능력에 따라 그 수준에 맞는 일관성이 있는 것이죠. 아동심리상담가나 정신과 전문의에게 있어서는 진술의 신빙성을 가늠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아닙니다. 다만 인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우리 법원이 전문가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는 게 문제겠죠.”

연세대 정신의학과 신의진 교수(아동성폭력 전문)는 “경찰이나 검찰, 판사들과 심지어 부모들도 아이의 진술을 어떻게 이끌어내야 하는지, 어떻게 판단해야 좋은지 알지 못한다”며 “모르면 전문가의 소견을 물어야 하는데 우리 법원은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외국에선 반드시 처음 사건이 접수되었을 때부터 전문 상담가나 전문의의 도움을 받게 하고 법적 소송과정에서도 피해자를 대신해서 전문가들이 팀을 이루어 소견을 반영하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돼 있다. 신의진 교수도 이 제도에 따라 미국 유학시절 레지던트 과정에서 법적자문 트레이닝을 거쳤다. 그러나 한국 의학계에선 이런 교육과정도 마련돼 있지 않거니와 막상 전문가가 나서서 도움을 주려고 해도 법원이 그 비용을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

으로 어려움이 많다는 지적이다.

“아이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가 이들의 말을 얼마나 불신하느냐의 문제라고 봐야죠. 정말로 법이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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