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으로…>의 말없음표가 가리키고 있는 소실점

친구의 경고 아닌 경고가 영화 <집으로…>를 보러 가는 발길을 늦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적시고 있었다. “그 영화 되게 잘 만든 영화구 나무랄 데가 없어서 영화평 쓰기 힘들텐데.” 영화를 다 보고 나온 후 정말 끌탕을 쳤다. “어쩌면 좋아, 정말 착하고 순한 영화네. 이렇게 순한 영화를 두고 뭐라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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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이해하는 독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집으로…>를 대하는 첫 느낌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저 말없음표로 끝나버린 미완의 제목이었다. 일반적으로 말없음표는 최종적인 선택 앞에서 머뭇거리는 주체의 몸짓을 나타낸다.

최종적인 결정을 망설임 속에서 지연시키던 그녀/그는 이 힘겨운 끝맺음의 과제를 상대방 독해자에게 맡겨 버린다. 그래서 말없음표의 문장들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르가 연애편지 아니던가.

이정향 감독이 가깝게는 자신의 외할머니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에게 경외감을 표현하기 위해 공들여 만든 영화 <집으로…>가 겸손하게 사양한 최종적인 결어는 ‘(외)할머니란 누구인가’에 대한 명료한 대답이 아닐까? 일단 영화가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집’은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언어 이전, 혹은 언어 밖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영화는 시간의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살’의 물질성, 할머니의 그 ‘늙음’을 자연의 초록/황토빛 속에 남김없이 흘러들게 만든다.

언어가 필요 없는 곳. 왜냐하면 지시어와 지시대상 사이에 갈등이나 분열이 없으니까. ‘나’의 주장이 솟구칠 필요가 없으니까.

일체의 도구적 언어사용과 문화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내고 세심한 영상언어로 속 깊은 교감의 서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집으로…>에서 그러니까 외할머니는 그 역력한 육체의 물질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 나름의 방식대로 결핍되어 있는 어떤 것, 또는 우리 모두가 가고 싶었으나 가보지 못한 어떤 ‘시공간’을 나타내는 기표이다. 충북 영동의 오지에 오롯이 잠겨있는 이 외할머니, 최첨단의 테크놀로지와 소비문화 생활양식으로 관통되어 있는 글로벌 대도시 서울에서 내려간 어린 소년이 한달간 ‘꿈결처럼 맛볼 수’있었던 이 외할머니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수시로 마주치는 실제 할머니이면서 동시에, 아니, 그보다 더 우리의 상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유토피아적 소망 이미지인 것이다.

소년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돌아가는 집은 ‘집-아니-어떤-곳’이다. 영화가 머뭇거림으로 가리키고 있는 소실점이 우리의 원망과 꿈의 진원지, 그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도 결코 채워 넣을 수 없는 텅빈 구멍이라는 것이 바로 <집으로…>의 선함을 지탱시키고 있는 슬픔이다.

영화는 수줍게 미소지으며 ‘집으로 갈래?’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이 권유의 말은 ‘집이 어딘지 알고 있니?’를 질문하고 있는 의문문이라는 것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되이 ‘외할머니가 계신 집’을 찾아 헤매일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저 ‘외할머니’와 닮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오해할까.

<김영옥/ 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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