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섹스광이었습니다. 집이 작아 큰방엔 문도 없었고 작은방에서 큰방이 훤히 보이는데, 남편은 날 때린 후에도, 아이들을 때린 후에도 아이들이 자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작은방에 가 있으라 하고 옷을 벗겼습니다. 난 언제나 강간당했습니다. 당해야만 했습니다. 거부하면 그것 또한 나와 아이들에게 돌아올 매의 트집거리니까요.”

얼마 전 10여년간 지속적으로 폭행과 강간을 일삼아온 남편을 살해한 안씨가 쓴 진술서의 일부이다. 이처럼 폭행 후 이어지는 강압적 성관계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여성들은 범죄자로 돌아서게 된다.

“더이상 참을 수 없다” 폭력피해자가 가해자로

안씨의 경우처럼 극단적 결과로 드러난 경우는 드물지만 ‘아내강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은 많다. 신정자 교수(경북대 사회복지학)는 “아내강간 발생 정도를 먼저 살펴보면 조사 대상자 및 조사시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나지만, 적게는 33%에서 많게는 55.1%의 기혼여성이 실제로 남편으로부터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각 지역 여성의전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등 관계자에 따르면 이 때문에 상담을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 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상담위원은 “상담자 가운데 상당수가 폭력을 동반한 원치 않는 성관계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지만 강간만을 따로 처벌하기보다는 이혼하려는 경우가 많아 그동안 이 문제가 묻혀왔다”고 말한다.

여성학 내부에서만 거론되던 ‘아내강간’이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된 것은 2001년 4월로 아직 1년이 채 안된다. 남편의 폭력과 강제적 성행위 요구에 저항하다 남편을 숨지게 한 사건이 발단이 돼 여성계가 ‘아내강간’을 인정하고 처벌할 것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해 여성부가 내놓은 ‘여성폭력방지 종합대책(가안)’에 아내강간 조항을 신설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 문제는 비로소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 가치관이 공고하기 때문에 현재 여성부가 부처간 협의를 진행중이지만 법 제정을 통해 아내강간을 처벌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여성계와 진보적인 형법학자들은 현행 형법상 강간죄로 아내강간을 처벌함으로써 법의 실효성을 높이자고 제안하고 있으며 이 제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특별법을 만들어 ‘아내강간죄’를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동안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현행 강간죄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에 대해 강간죄로 규정하고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처벌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강간죄의 객체는 여성이며, 보호법익(해당 법률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정조’나 ‘여성의 성적 순결’이 아닌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데 합의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의 통설과 판례는 강간죄를 남성이 그의 ‘법률상의 처가 아닌 여성’에 대하여 ‘최협의의 폭행·협박(가해자가 피해자의 저항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거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사용한 간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 3월 10일 대법원이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써 강제로 처를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

다”고 판결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장정순 소장은 “부부간 소통이 잘 되고 문제가 없을 때는 강간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부부싸움 후에 ‘화해’를 구실로 아내에게 성행위를 강요하거나 이혼을 앞둔 사실상 남남인 남편이 아내를 성폭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방적으로 아내를 때리고 성폭력을 가하는 관계를 어떻게 부부관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반문하며 “성폭력 범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국 교수(서울대 법대)는 “우리 형법은 ‘아내강간’을 제외한다는 의사를 전혀 표시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혼인계약에 폭행·협박에 의한 성교를 감수한다는 조건이 내포되어 있다거나 여성이 혼인 후에 성적자기결정권을 포기했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한다. 조 교수는 또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성적자기결정권으로 본다는 것은 강간죄의 성립 여부를 가해자의 폭행·협박의 정도가 아니라 피해자의 의사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간죄의 폭행·협박을 ‘최협의의 폭행’으로 한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법개정 없이도 현행법의 탄력적 해석을 통해 ‘아내강간죄’가 성립될 여지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반대론자들의 ‘입증의 어려움’ ‘악용할 소지’ ‘가정파탄 조장’ 등과 같은 우려에 대해서도 조 교수는 “입증의 곤란이 범죄성립을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없고 가짜로 고발을 할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거부될 수는 없다”면서 “강간죄는 친고죄이기 때문에 국가형벌권의 개입으로 혼인이 파탄날 가능성은 봉쇄되어 있다”고 잘라 말한다.

현행 강간죄 세분화·형량 다양화 필요

이에 더해 현행 강간죄 하나로는 아내강간, 데이트강간 등 특수한 형태의 강간은 아우르지 못하므로 이를 세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고 있다. 심영희 교수(한양대 사회학)는 “폭행이나 협박의 정도도 다를 수 있고 이에 따라 형량도 달라져야 하는데 현행 강간죄는 피해 여성이 저항하지 못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을 사용한 경우에만 국한시켜 해석하여 나머지 경우에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국이나 독일처럼 강간죄의 대상을 다시 규정하고 세분화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조국 교수도 “강간죄에서의 폭행·협박을 가해자가 피해자의 저항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거나 ‘합리적’ 또는 ‘진지한’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폭행·협박으로 정의하면 강간죄가 ‘비동의간음죄화’되는 것을 막으면서도 현재의 통설과 판례가 ‘화간’으로 치부해버리는 행위를 포괄하여 처벌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한국여성개발원 박영란 연구위원은 “부부간의 일회성 싸움까지 범죄로 다루자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일방적, 반복적으로 피해를 당할 때 이것이 살인 내지는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예방하자는 의미”라며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성폭력도 심각하지만 배우자로부터 당할 수 있는 성폭력은 더욱 더 심각하기 때문에 사회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4월 경 설문조사를 통해 아내강간의 실태를 파악하고 공론화할 계획이어서 아내강간 문제는 2002년 여성계의 주요 이슈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최이 부자 기자 bjchoi@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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