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이렇게 자연스레 당신을 잊은 채 나, 잘 살고 있었구나. 내 인생에서 당신을 삭제할 수는 없는데, 생활이라는 무대에서는 여지없이 밀려나는구나, K. 물론 당신 코드 속에서 나도 마찬가지 신세겠지.

세상살이는 나이로 하는 게 아니라 인생곡선에 의해서 만들어지더군. 내 나이 아줌마들은 사춘기 자녀 때문에 골치를 앓거나 다시 돌보기 시작한 자기 삶의 과제로 열을 올리더라만, 이제야 겨우 사람다운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가 철썩 붙어있는 나로서는 그들과 처지가 달라도 엄청 다르지.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조차 사치인 지금, 사랑 레퍼토리 - 남녀 상열지사로서의 사랑만 사랑인 것은 아니건만 그런 강렬한 사랑 말이야 - 는 사치 중의 사치잖아. 사랑을 키워드로 품고 다니는 사람이 주변에 남아있지도 않아. 그러니 K, 당신의 약발도 시효가 지난 거지.

당신을 우연이라도 만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 시절 당신에게 나는 순수의 표상이었을 거야. 좋은 말로 순수이고, 실제로는 쥐었다 흔들었다 할 수 있는 만만한 순둥이였겠지. 그러니 당신이 느끼게 될 낯설음이 눈에 선하네. 몸매나 표정, 말투. 달라지지 않은 게 없으니까. 무엇보다 세상을 만나는 시선, 당신을 보는 눈매가 달라졌을 테니까.

당신도 변했겠지. 배나 엉덩이 곡선의 처짐을 누가 말리겠어. 부드럽던 어깨선은 그대로 살아있을까? 그나저나 지독하던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관계맺음 방식은 기필코 말랑말랑해졌어야 하는데 말이야. 유아적 자기보호 습성은 좀 고쳐졌는지, 아님 여전히 상대방을 막무가내로 쿡쿡 찔러대는지. ‘참을 수 있다느니. 이 정도의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느니’ 하며 당신을 용서할 줄만 알았던 착하디 착한 나도 당신을 참아내지 못하고 결국 떠났잖아. 당신이 그걸 알았다면 우리가 달라졌을까? 연인이든 부부든 어떤 인연을 맺고 있을까?

그러나 K! 누군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던 그때로 나를 데려다 주겠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할거야. “미쳤소? 안 돌아가겠소” 라고 말할 거야. 당신을 사랑했던 것이 후회스럽기 때문도 아니고, 지금이 몸서리치게 좋아서도 아니고, 내게 다시 과거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야.

나는 충분히 당신과의 관계에서 성장의 쓴맛 단맛을 다 보았거든. 스스로를 기죽일 것이 아니라 키워냈어야 한다는 것, 마냥 참을 것이 아니라 단단히 맘먹고 신랄하게 따졌어야 한다는 것, 말 안해도 알아서 안타까워하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어야 한다는 것, 당신의 공치사에 황홀해 할 것이 아니라 납득할 만한 나 스스로의 칭찬에 인색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과 만나면서 충분히 체험했거든. 그 누구보다 앞서가는 측면이 많았어, 당신에게는. 그런 것들에 압도당하여 당신의 미숙한 인간관계 지수마저 감당하려 했던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를 추스를 수 있었거든.

물론 당신도 변했겠지.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어졌기를 바래. 달짝지근하지만 솔직하지는 않았던 매끄러움이 아니라 다소 거칠더라도 자기를 보여주는 그런 만남이 당신에게서도 가능해졌기를 바래.

당신과의 사랑. 무엇보다 이렇게 추억할 수 있으니 좋네. 사랑? 좋지. 그러나 당신과 했던 그런 사랑은 사절이야.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정말 그렇게 희귀한 사람이었을까? 멋진 구석도 많지만 알면 알수록 사람을 소모시키고 쓸데없이 외롭게 만드는 많은 남자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경미/ 전북여성단체연합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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