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모흐센 마흐말바프) 자신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영화 <칸다하르>가 상영되고 있는 90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과 기아로 21명 이상의 사람이 죽어 가고, 90여명의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난민이 된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이 수치를 떠올릴 겨를이 전혀 없다. 영화는 한 편의 서정시처럼 아름답고, 비참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의 빛으로 눈부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무거운 외투처럼 걸쳐 입고 때론 현란하게, 때론 고즈넉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부르르 떠는 이 이상한 문화체험. 참혹과 절망의 일상 속을 마술램프처럼 비추고 있는 저 ‘희망의 시선’을 견뎌내는 올바른 방식은 무엇인가. 저 희망의 시선은 도대체 누구의 시선이란 말인가. 아프가니스탄의 일상을 90분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는 영화 <칸다하르>는 재현물로서의 자기 유혹이 파놓은 함정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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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곳’에 있는 ‘그들’의 황폐하고 처참한 삶을 강조함으로써 ‘이곳’에 있는 ‘우리’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은연 중에 확인시키는 상투적인 재현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곳’에도 부부 사이의 살가운 애정이 있고, 결혼 축제가 열리고, 적극적인 생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미학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보편적 감수성을 환기시킨다. ‘자연’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닮고 있는 이 ‘강요된 보편성’은 그러나 ‘그들’의 비참함과 ‘우리’의 안락함 사이의 차이만큼, 아니 그보다 더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공중에서 한가롭게 낙하하는 의족들을 향해 아프리카 초원에서 질주하는 얼룩말떼처럼 일제히 달려나가는 목발 진 남자들의 모습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은 사지가 멀쩡한 ‘우리들’의 오만하고 게으른 시선이 선점한 차이의 허구가 아니라 지뢰밭이 여전히 ‘정상적’인 일상적 공간의 일부인 이 현실을 고통스럽게 질문하는 윤리성이 아닐까.

영화에서 ‘칸다하르’는 도달해야 할 어떤 곳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마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길떠나는 사람들의 그 ‘이웃’이 있는 먼 마을처럼. 여기에 바로 영화 <칸다하르>의 내적 고민이 응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칸다하르’는 신발끈을 매는 바로 이 자리이고 또한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스치게 되는 그 ‘모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말해서 ‘칸다하르’는 그곳에 도착하고자 길을 떠난다면 결코 도달하지 못할 상상적 공간이며 동시에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여기’로 도적떼 같이 쳐들어 오는 실재의 공간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부르카의 어두운 창살 속에서 ‘칸다하르’를 응시하는 시선, 중앙의 한 점 흰빛으로 졸아든 태양과 겹쳐지는 이 시선은 여동생을 찾아가는 나파스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카메라의 시선이고, 그리고 빈 괄호로 남겨진 ‘우리’의 시선이다.

부르카를 뒤집어 쓴 채 미이라처럼 사막에 서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 산 채로 박제된 그러나 색색으로 사막을 채색하는 부르카의 펄럭임은 강제로 박제당한 삶의 다양성에 긴 손짓을 하고 있다. 당신도 손을 들어 화답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그리고 당신의 선택은 소비문화자본주의 시대에 모든 이미지의 소비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에게 확인시킬 수 있는 명백한 기회이기도 하다.

<김영옥/ 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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