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수많은 여학생·교사 독립운동 선봉에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특이한 현상은 여성들의 역할이었다. 약 20년 전만 해도 외국인 남자는 한국에 여러 해를 살아도 여자를 접촉해 볼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거리에서도 만날 수 없었고, 한국인 친구의 가정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캐나다인 기자 맥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가 1920년 집필한 <한국의 독립운동>에는 당시 여성들, 특히 어린 여학생들의 투쟁을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데 “일례로 3월 5일 수요일 경찰에 잡힌 사람들의 경우 거의 다 여학교 학생들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미션스쿨에서는 여학생들이 미국인 선생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전원이 자퇴서를 내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경찰서장에 찾아가 ‘내가 주동자이니 나를 체포하라’고 말한 여학생도 있다. 이들 10대 여성들은 “독립을 위해 우리 여자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여성오십년사>와 <한국여성운동사> 등의 자료에서는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여성들과 만날 수 있다. 서울 경성여고보의 최은희, 배화여고보의 김정애, 숙명여고보의 황현순, 이화여학교의 신마실라, 정신여학교의 김마리아, 진명여학교의 나혜석… 그리고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그 유명한 아오내 장터 시위를 이끌었던 유관순, 개성 지역의 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어윤희·이경지 자매, 평양의 안정석·박현숙, 대구의 이순애, 부산의 주경애 등이 역사에 남은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화팔십년사>에 “주동자로 몰려 투옥되고 검거된 학생들의 명단과 참여자 여부는 현재 알 길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이름 없는 수많은 여학생들과 여교사, 여성종교인들이 전국에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을 것임에 분명하다.

지역별로 만세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그 가닥을 잡을 수 있다. <매일신보>에는 서울을 비롯한 평양, 개성, 진주, 목포 등지의 만세운동에 대해 ‘여학생이 시작했다’‘여성들의 소요’‘여학생의 음모’‘여자가 많았다’…고 기록한 내용들이 수도 없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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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 여학생이 시작’‘진주 - 기생이 앞서서’‘구마산 - 여자가 많았다’… 1919년 3월 <매일신보>를 장식하고 있는 기사들은 전국 방방곳곳에서 여성들이 시위를 주도했음을 말해준다.

당시 한국의 상황을 보도한 외국언론들은 특히 일본이 여성들에게 가한 잔혹한 폭력에 대해 고발하고 있는데 “일본의 음란하고 잔혹한 행위는 갈수록 더하여 조선 여학생들이 받는 고문은 너무나 심해서 차마 귀로 듣고 입에 담을 수 없다”는 내용이 여러 곳 눈에 띈다. 심지어 일본의 재팬 크로니클에서도 조선여성에 가해진 성고문과 잔혹행위를 지적, “포박된 조선부인과 여학생들에 대한 학대에 대해 일일이 지면에 싣고 싶지만 기재할 수 없다”며 일본정부의 각성을 촉구할 정도였다.

성고문… 신체절단… 잔혹행위에도 굴하지 않아

당시 조선여성 고문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여성들은 체포되면 거리에서 옷을 벗기고 일본 헌병들이 보이는 곳에 세우고 희롱… (대한독립신문) 나체로 만들어 발로 걷어차고 유방은 소에 대하는 듯이 쥐어짠다(북경 데일리뉴스), 담배불로 어린 소녀들의 연한 살을 지지고 태우며(맥켄지)… 고통이 길게 가도록 간격을 두고 태형을 가하며 옷을 입으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는 수족이 이미 마비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차이나 프레스)… 조선여성들을 ‘추업부’(창녀…식의 표현)라 불렀다(재팬 크로니클).

또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기록에는 “자주 사용한 고문법으로 ‘소좆몽둥이’(소의 생식기를 뽑아 말린 것)를 물에 불려 여성 음부에 삽입했다”고 되어있으며 여성들의 팔을 자른 사례들도 전시돼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는 것을 무엇보다 수치스럽게 여기던 조선여성들을 일제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억압했지만, 재판기록에 따르면 당시 여성들은 일본검사와 재판장 앞에서 나이 어린 소녀이건 할머니이건 너무도 당당하게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외쳤다.

“우리도 나이 20고개요. 나라 사랑할 줄 모르는 병신은 아닐 테니 더 묻지 마오.”(전주 만세시위의 임영신) “눈깔이 멀었으면 애국심도 멀었나요.”(개성 미리흠여학교 심명철) “다 같은 일본법률 밑에서 내가 얼마나 큰 덕을 입겠다고 공소를 하겠소.”(재령군의 박원경 여사)… (추계 최은희 전집 <한국근대여성사> 중에서)

천안 아오내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주도하였고 “일본인은 나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재판을 받느냐!”라고 호통을 치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내던졌던 이화학당의 유관순은 여성들의 독립의지가 얼마나 굳건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 역사의 증인이자 영원히 살아있는 민족의 ‘언니’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등 모진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1920년 가을 17세의 나이로 옥사하기까지 옥중투쟁을 계속했었다.

“3·1운동은 조선여자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한 첫 막이었으니, 이 첫번 시험에서 여자는 병신도 아니고 천치도 아니고,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것을 자타가 인정하게 되었다”(황신덕, <조선부인운동의 사적고찰>)는 평가는 매우 미미한 것이다.

나이와 신분과 온갖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 일제의 폭력 앞에 비폭력 무저항 시위를 앞장서 벌였던 여성들의 용기와 의지는 우리가 재조명해야 할 소중한 역사이자 우리 안에서 다시 살려내야 할 정신이다.

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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