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친구 ‘삐삐’는 영원하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양갈래로 뻗쳐 땋은 머리를 하고는 보는 이의 마음이 환해지도록 씩씩한 웃음을 짓는 소녀. 짝짝이 긴 스타킹에 커다란 신을 신고는 비틀비틀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소녀. 70년대 후반 TV시리즈로 방영된 <말괄량이 삐삐>를 본 이들이라면 삐삐의 그 강렬한 인상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자립심 강하면서 자유분방한 삐삐는 전세계 어린이들의 영웅임에 분명하다. 슈퍼맨 뺨치는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금화가 가득 든 가방에다 뒤죽박죽 별장이라는 곳에서 부모의 간섭없이 망아지와 원숭이랑 살면서 학교도 가지 않고 항상 신나는 모험 같은 일상을 즐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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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 스웨덴의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지난 1월 28일 스톡홀름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향년 94세).

“불행했는데 내 책을 읽고 행복을 맛본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는 그는 18살에 미혼모가 되어 혼자 아이를 기르면서 겪었던 한없는 외로움과 쓸쓸함 때문에 고아나 빈민촌 아이같이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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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불쌍한 고아가 나오는 동화는 행복한 아이를 위한 동화입니다. 부잣집 아이들은 주인공을 통해 자기가 겪어보지 못한 굶주림과 불행을 겪으면서 신기해하죠. 그러나 진짜 불행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은 삐삐처럼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을 겁니다. ‘삐삐는 엄마, 아빠가 없는데도 재밌게 사는구나. 나도 힘내야지’하고 말이죠.”

린드그렌은 언제나 그의 이야기 속에서 힘없고 억눌려 있는 아이들 편을 들고 있다. 또한 그는 아이들이 원하고 꿈꾸고 상상하는 것을 아이들의 언어로 풀어낸다. 그의 동화가 반세기 전이나 오늘날이나 여전히 사랑받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말괄량이 삐삐가 이 세상에 나온 건 아주 우연이었다. 평범한 주부였던 린드그렌은 폐렴으로 앓아누운 어린 딸 카린을 위해 자장가 대신 이야기를 지어 들려주었다. “힘이 센 그 아이는 친구를 괴롭히는 남자 아이 네 명을 한 손으로 들어서 던져버렸어. 그 아이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린은 ‘그 아이’에게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린드그렌은 이때부터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특한 성격의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빙판길에 넘어져 다리를 다친 린드그렌은 삐삐의 모험담을 책으로 만들어 딸에게 선물하고자 이야기를 글로 써 보니엘이라는 당시 스웨덴 최고의 출판사에 보냈다. 하지만 출판사 편집자들은 괴력을 가진 여자 아이 이야기에 놀라 아동의 환상에 부적절하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했다. 그러자 린드그렌은 원고를 라벤 앤 쉐그렌사라는 출판사에 다시 보냈고, 우여곡절 끝에 그 이듬해인 1945년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빨간머리 소녀 삐삐의 이야기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책은 68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후 린드그렌은 동화뿐만 아니라 그림책, 희곡, 미스터리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100여권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온갖 종류의 아동문학상을 휩쓸었다. 린드그렌이 쓴 책들을 펴낸 라벤 앤 쉐그렌사는 큰 출판사가 되었고 린드그렌은 이 곳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스웨덴 아동문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린드그렌의 부고를 들으면서 크루멜루스 알약을 먹어 언제나 9살인 삐삐가 더욱 그리워진다. 우리는 삐삐 롱스타킹 같이 당차고 독립적이면서도 낙천적인 여성 캐릭터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정주 기자 jena21@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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