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기 추모일 맞춰 작품집 잇따라 출간

“여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확실히 생긴 후 페미니스트 아닌 길은 선택할 수 없었다”는 극작가 엄인희의 1주기가 곧 다가온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으로 잘 알려진 그는 작년 2월 25일 4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선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시인 고정희가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평가받는다면 엄인희는 페미니즘과 연극을 결합시켜 한국 페미니즘 연극을 만들고 살찌운 희곡작가이다. 그가 쓴 <작은 할머니> <절망 속에 빛이 있다> <이혼해야 재혼하지>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비밀을 말해줄까?> 등은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작가적 인식이 동시에 배어나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작가 송미숙은 이 작품들에 대해 “울다가, 웃다가, 흥분하다가, 한탄하다가, 몸부림치다가, 또 나의 얘기인 것 같아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 여자로 태어난 것이 참 행복하구나!”라고 적고 있다.

<작은 할머니>는 외할머니가 둘인 작가의 외가쪽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아들을 못 낳은 여성의 삶과 독립운동가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씨받이가 된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그여자의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어 95년 그해의 수작으로 꼽혔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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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엄인희 작가

<절망 속에 빛이 있다>는 성폭력이란 어떤 행위이고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은 것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배우의 입을 빌어 “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가치를 세워나가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해보는 것조차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는 또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몇년 전 나는 여성과 섹스에 대해 고민했다....여자들은 왜 섹스에서 소외되어 대상이 되고 있을까? 자기 몸으로 자기 본능을 스스로 잘 알아서 누리지 못하는 건 왜 그럴까?... 섹스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어서 그는 “그곳에는 ‘자궁’‘잃어버린 낙원’이 버티고 있었다 ”는 걸 깨닫는다.

‘생리전 증후군’에 걸린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자궁과 생리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 <비밀을 말해줄까?>에서는 “오늘날 여성들한테 그들의 자궁이 자기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일까?”라고 묻는다. 여성의 몸 안에 있지만 온전히 여성의 것이 될 수 없는 자궁은 여성이 자궁암에 걸릴 때에야 비로소 여성의 것이 될 수 있고 그때 여성은 자궁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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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인희 작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의 한 장면.

그는 어려서부터 희곡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대학도 연극과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해마다 작품을 써서 신문의 신춘문예에 응모를 했다. ‘왜 작가가 되고 싶었나?’

라는 글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항상 두 상을 차렸다. 진짜 상 위에선 남자들이 먹었고, 상 밑의 쟁반에선 여자들이 먹었다. 나와 언니와 어머니가....나는 남자들처럼 상 위에서 좋은 반찬을 먹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머니처럼 살지 말고 남자들처럼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발단이다.”

낙방을 거듭하던 그는 81년 조선일보에 <부유도>, 경향신문에 <저수지>가 한꺼번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작품을 썼다. 또한 안양문화예술운동연합 의장으로 극단을 이끌며 전국의 노동현장과 지역 집회에서 연극과 뮤지컬을 공연했고, 노동자·빈민·어린이 등을 상대로 연극교실을 열기도 했다. 그의 희곡이론서 <재미있는 극본쓰기>는 자신들의 문제를 연극으로 만들어보려는 현장 사람들과의 공동 작업 속에서 탄생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희곡 쓰기는 쉬울 뿐 아니라 무척 재미있다고 얘기한다. 그는 글로 쓰는 것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삶을 곧 그대로 글로 옮겨야 재미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희곡은 연극을 위한 글이므로 “들리는 말”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성문제와 사회문제를 편하고 쉬운 말로 재치있게 꼬집어내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작년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그동안 발표한 수십 편의 작품들을 모아 작품집을 낼 계획이었

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은 남편 이회수씨의 몫이 되었다. 1년 가까운 작업 끝에 그의 작품집 세 권이 그의 1주기 추모일에 맞춰 북스토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1권에는 그의 여성주의 작품 다섯편과 신춘문예 당선작 두편 그리고 우리 소리와 몸짓을 맛깔나게 구사한 희곡 세편이 실린다. 2권은 그의 <재미있는 극본쓰기>로 이루어지며, 3권은 인형극, 위인극, 민족 전래 동화극 등을 비롯해 그가 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썼던 희곡 모음집이다.

또한 이회수씨와 그의 동료들은 그의 기일에 출판기념회를 겸한 조촐한 추도행사를 가질 계획이라고 한다.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역사는 집단기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여성 작가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성 작가들의 글을 읽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글은 우리의 문학사에서 잊혀지고 덮힐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고정희 시인을 적극적으로 기억해내고 그에게 의미를 부여했듯이 이제 우리는 작가 엄인희에 대해 집단적 기억을 시도할 때이다.

이정주 기자 jena21@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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