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시인/ 서울예대 교수

마음먹고 한번 기운차게, 흘러가는 시간에 이빨을 박아보지도 못했는데, 세월은 제멋대로 흘러가서 또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이렇게 해가 바뀔 때마다 일상의 힘에 짓눌려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일생이 다 가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특히, 집에서 일을 하건 집 밖에 나가서 일을 하건간에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사는 것이 ‘여자의 삶’이라는 자괴감이 엄습하는 순간을 종종 맞닥뜨리는 우리 여성들에겐 그 증세가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마음이 증폭될 때 우리는 우리의 의미 없어 보이는 이 시간들을 위로해 줄, 아니 위로는 못해 주더라도 우리의 처지를 대신 말해 줄 무언가를 찾게 된다.

왜냐하면, 나이 든 여성인 우리에겐 지금까지 우리의 이 평범한(그렇다고 규정되어 온) 시간들을 말하고 의미화해 줄 언어가, 입이 제대로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문학작품도 읽어본다.

그 결과 비아냥거리는 말이건 사실을 말하는 것이건 온갖 문화상품들을 소비하는 주도적인 계층은 여성이 되어 버렸다는 폄하 섞인 말을 또 듣게 된다.

그러니 간혹 넥타이 맨 중년남성들이 영화관에 가거나 책을 읽게 되면 무슨 대단한 뉴스라도 생긴 양 말들이 많아지고 그 문화상품도 저절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 주변에서 여성의, 그것도 중년여성의 삶을 그린, 그래서 우리 삶의 허망한 대변자라는 명명으로라도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아니, 중년여성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한국에 사는 여성들의 삶을 온전하게 사실적으로 그려주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요즈음 개봉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혹은 작품성이 높아 관객의 외면을 받는다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속의 여성들은 모두 다른 나라의 여성들이거나 스스로 남성이 된 여성들 혹은 비현실의 여성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과도하게 능력 있거나 과도하게 신비롭기만 하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여성들은 의상만 지금 여기의 것을 걸쳤지, 모두 일제시대 이전의 여성적 세계관들을 갖고 있다.

그들의 태도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떠나거나 희생하며, 혼자 그 남자의 아들을 키우고 이 한목숨 바치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남자를 앗아간 과도하게 능력 있는 여성으로 과장된 상대 여성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자행하기 위해 남몰래 칼날을 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사회적 능력 있는 여성을 질투하는 것이 여성 모두의 정체성인 양 오해되고 만다.

이런 작품들 속에 그려진 중년여성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신의 삶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양, 결혼해서 아이 낳은 대죄를 지은 양 젊거나 더 늙은 주인공들의 부속물이 되거나, 그것을 거부하면 파렴치범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작금의 인구에 회자되는 문학작품 속의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비주의적 아우라로 몸을 감싸거나 아니면 일탈의 삶 그 자체가 목적이고 해방이기라도 한 듯 행동하고 있다.

도저하게 풀리지 않는 갈증 속에서 이런 작품 내지는 상품들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 도대체 우리나라의 예술가, 작가들이 여성들의 삶과 질곡, 현실을 그릴 줄 모르는 차원을 넘어서, 대면조차 하기가 겁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니 또, 풀리지 않는 갈증을 품고 극장과 책장을 넘어 다니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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