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교수

 

지하철 승강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네살짜리 아이, 엄마와 아빠가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아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반경 1~2미터 정도 원을 돌면서 “나 잡아봐라~~~”하고 달린다. 아이와 엄마,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흔히 애들이 공공장소에서 피해를 준다는 큰 소리도 아니고 그냥 웃고 뛰는 정도의 소리다. 그런데 승강장 긴 의자에 앉아 있는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욕을 해댄다. 공공장소에서 뭐 하는 거냐는 소리와 함께. “요즘 부모 ㅇㅇ들은 공공장소에서 예의도 없어. ㅇㅇㅇ들….” 이런 식이다. 그런데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을 향하고 있다. 욕지거리를 들은 아빠가 그 남자에게 따지러 갔다.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핸드폰만 쳐다보는 남자가 계속 욕을 이어나간다. ‘개·돼지같은 ㅇㅇㅇ들.’ 황당한 아빠가 “지금 너, 나한테 하는 소리냐고?”고 눈에 힘을 주고 물어보는데 여전히 그 남자는 핸드폰만 쳐다본 채 ‘트위터 읽고 있는데, 트위터에 대고 하는 소리’라고 대꾸한다.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없으면 그만 두라는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무시한 채 계속 아이와 부모에게 욕지거리를 해댄다.   

아이의 조그만 행동에 반응하던 부모는 순식간에 개 혹은 돼지가 됐다. 인간보다 훨씬 선하게 살아가는 개와 돼지들에게는 오히려 미안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어쨌거나 개·돼지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욕죄든 뭐든 부모는 경찰을 불러 그 남자와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다. 그러나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트위터에 대고 한 이야기라고 우기는 남자의 반응을 보니 경찰 신고가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갑자기 이 남자가 뭐라도 꺼내서 휘두르면 어떻게 하나 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직후 탄 지하철 안은 꽤 북적거렸다. 어른들 사이에서 시야가 막힌 아이가 답답해 할까봐 아빠는 목마를 태웠다. 아빠 목 위에 올라간 아이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을 수 있어서 즐거워했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그냥 대화 할 때 나는 수준 정도의 소리였다. 그런데 아빠의 앞, 이른바 경로석에 앉아 있던 여성노인이 한 소리 한다. 그렇게 하면 애 버릇 나빠진단다. 당장 아이를 밑으로 내려놓으란다. 애가 뛰어다닌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고 그냥 지하철을 타면서 아이 목마를 한번 해준 아빠는 버릇없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되었다. “상황을 모르면 아예 참견하지 말고 조용히 계시라”고 아빠가 여성노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아이가 놀랄 것 같아서 큰 소리나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냥 딱 그 한 문장이었다. 그러자 여성노인이 큰 소리로 “내가 나이가 90인데 내 말을 무시한다고, 요즘 것들은 버릇도 없다”면서 일장 연설을 시작할 분위기로 대꾸했다.

아이가 어른들의 다툼을 보면서 위축되고 무서워할까봐 부모는 그 자리를 피했고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내렸다. 부모는 기분이 무척 나빴다. 그런데 아이는 본래 세상이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 양 싱글싱글 부모의 손을 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다.

아빠로서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다. 한국사회에서 어린아이와 함께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할 경우 보행환경이 매우 차별적·배타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버스기사나 지하철 역무원의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아동·가족 적대적 보행구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부모를 순식간에 개·돼지로 만든 그 남자와 나이가 90이라 거침없이 기분대로 말을 내뱉는 여성노인은 그냥 개인적·개별적 사례일까, 아니면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존재할까?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날 이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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