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찍었다면 ‘성폭력 피해’ 인정 안돼

가해자 음란물 유포죄 적용해 형량도 ↓

현행법엔 구멍이 있다. 피해자가 직접 자신을 촬영했다면 ‘성폭력 피해’로 인정받을 수 없다. 최근 가해자들이 10대들을 꾀어 직접 사진 등을 찍어 보내게 하는 ‘그루밍 성범죄’가 늘었다. 10대들 사이에선 자기 ‘몸캠’을 찍어 특정 사이트 운영자에게 파는 ‘톡 스폰’도 유행했는데, 해당 영상이 캡처돼 불법 사이트 광고에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은 타인을 촬영한 경우를 명시한다. 본인이 본인의 신체를 촬영한 촬영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유포된 경우 성폭력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경우 가해자에게 음란물 유포죄, 사이버 명예훼손죄(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위반 혐의)가 적용돼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성폭력처벌법에 비하면 형량도 훨씬 낮다. 김현아 법무법인 GL 변호사는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한 것은 똑같은데, 피해자가 직접 촬영했다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음란물 유포죄’가 적용되면 피해자는 ‘음란한 행위를 한 여성’이 되는 셈이다. 성폭력피해자보호에관한법률상 지원도 받을 수 없다. 피해자의 감정은 물론 일반인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관련법이 빨리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불법촬영유포죄 관련 개정안

30개 이상 나왔지만 대부분 국회 계류

이미 불법촬영·유포 범죄 처벌 강화에 초점을 맞춘 성폭력처벌법과 관련법 개정법안만 30개 이상 발의됐다. ▲상대의 동의 없이 촬영물을 영리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유포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형만으로 처벌 (남인순 의원 대표발의) ▲벌금액을 징역 1년당 1000만원의 비율로 개정 (김삼화 의원, 정성호 의원 각각 대표발의) 등이다. 법의 구멍을 막기 위한 법안도 여럿 발의됐다.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등 피해가 막중한 촬영물을 유포한 경우에는 징역형으로만 처벌(법무부) ▲자신의 신체 촬영물을 동의 없이 제3자가 유포한 경우 처벌조항을 신설(법사위) 등이다. ▲신체를 촬영한 사진·영상을 촬영한 경우도 처벌하는 법안 ▲지인의 사진을 음란한 이미지에 합성·유포하는 일명 ‘지인 능욕’ 범죄 처벌 규정 신설 법안도 마련됐다. 

그러나 모두 아직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및 디지털 성범죄 근절 추진 협의회’가 내놓은 디지털 성범죄 관련 8개 입법과제 중 7개도 국회 계류 법안 명단에 포함돼 있다.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및 디지털 성범죄 근절 추진 협의회’가 디지털 성범죄 관련 8개 입법과제를 내놓았지만, 17일 기준으로 7개 법안이 아직 국회에 머물러 있다.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및 디지털 성범죄 근절 추진 협의회’가 디지털 성범죄 관련 8개 입법과제를 내놓았지만, 17일 기준으로 7개 법안이 아직 국회에 머물러 있다.

여성계는 관련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12일 논평을 발표하고 “이번(수원지법) 판결은 환영할만한 일”이나, “안전한 일상을 위해서는 여전히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시각 변화와 사전 예방·엄벌을 위한 정부와 국회의 노력이 필요하다” “20대 정기국회는 발의된 관련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여성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라고 촉구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8월 펴낸 입법·정책보고서 ‘디지털 성범죄 대응정책의 운영실태 및 개선과제’에서 ▲불법촬영물 온라인 유포자에 성폭력처벌법 엄격히 적용 ▲초동수사 강화 ▲공익광고를 통한 불법행위 유형 안내와 관련 지원기관 홍보 등도 주요 과제로 꼽았다.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지난 8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지난 8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불법촬영물 ‘야동’으로 소비해온 문화 달라져야

우리의 일상도 달라져야 한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지난 3월 발표한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지원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결국 피해자를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은 피해촬영물이 ‘국산야동’으로 소비돼 온 지금까지의 사회적 문화”라고 지적했다. 젊은 여성들은 더는 공포와 불안에 떨지만은 않고 ‘내 인생은 네 포르노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행동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더 혼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할 이유다. 

 

▶ ‘국산야동’ 둔갑한 불법촬영물 6만여건 지난해 시중 유통 http://www.womennews.co.kr/news/145121

▶ 정말 ‘남의 일?’ 디지털 성범죄에 찌든 대한민국 http://www.womennews.co.kr/news/145071

▶ 불법촬영 범죄 매년 느는데...70% 집유·벌금형 http://www.womennews.co.kr/news/14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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