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토지 최서희 역의 최수지, 대장금 서장금 역의 이영애, 미스터 선샤인 고애신 역의 김태리 ⓒKBS, MBC, tvN
왼쪽부터 토지 최서희 역의 최수지, 대장금 서장금 역의 이영애, 미스터 선샤인 고애신 역의 김태리 ⓒKBS, MBC, tvN

창의적인 여성상 그린 대장금 

여성 의병 다룬 미스터 선샤인

역사 속 여성 살려낸 여성 작가들 

오늘을 사는 우리 이야기를 쓰자 

얼마 전까지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는 ‘대장금’이었다. ‘대장금’을 보던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이전에는 토지였다. 이제 ‘미스터 션샤인’을 보고 나니 순위를 매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주체적인 삶을 개척해 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썼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여성이 써야 여성의 삶이 여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만큼 세밀하고 입체적으로, 그래서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페미니스트의 친구라 할 남성 작가들이 여성의 삶을 그린 작품도 있지만, 내게는 아직 그 감동이 최서희, ‘대장금’이나 고애신 만큼은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여성은 부수적이고 열등한 존재였다. 주인공의 연인, 아내, 딸, 부하직원, 하녀 등으로 등장하여 그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 폭력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고, 한 남자를 놓고 서로 질투도 했다. 어렸을 때 재미나게 본 ‘007’에는 꼭 섹시한 여자가 등장했는데, 악당 소굴에서 도망쳐 나올 때 틀림없이 넘어져서 인질로 잡혀 본드까지 위기에 빠트렸다. 어린 소견에도 작가가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토지’를 본 몇 해 후, 큰맘 먹고 두 달에 걸쳐서 박경리 선생의 소설 열여섯 권을 다 읽었다. 조선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한 마을 사람들 전체가 겪는 격랑의 거대한 이야기 구조, 주인공들이 운명에 꺾이지 않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삶의 행로를 선택해 나아가는 모습, 그 과정에서 작가가 인생과 사회, 국가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이 모두 나를 압도했다. 주인공 최서희는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할머니를 잃고 재산마저 빼앗기고 만주로 떠난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강한 의지와 대담한 선택으로 시절의 풍파와 규범의 족쇄를 넘어 자기의 생을 개척한다. 마침내 큰 부를 일구고 고향에 돌아와 빼앗긴 토지를 되찾고 가모장의 삶을 살아간다. ‘토지’ 이전에는 그 시절을 살았던 여성의 서사 중에 이렇게 강력한 인물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한 줄 기록에서 착상했다는 ‘대장금’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가는 전에 없던 여성상을 그려냈다. 대장금은 연구를 거듭하고 창의적인 업적을 이룩하는 전문직 여성이다. 프로페셔널이다. 고난에 처해도 굴하지 않고 바른 길을 가며,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몇 회를 보다가 이렇게 멋진 여성을 그려낸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알아보았더니 김영현이라는 여성이었다.

‘대장금’의 여정에서 그를 돕는 수많은 인물 중에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훗날 연인이요 남편이 되는 민정호 종사관이다, 그는 신분의 차이도 넘고 벼슬도 버리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대장금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다. 인품이 훌륭하고 가는 길이 의로운 것은 물론이다. 드라마니까.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멋진 연인상이야!” 하고 감탄했더니, 남편이 과연 그렇다고 동의하면서 저 과도하게 높은 기대를 어찌할꼬 하는 표정이 되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주인공이 다섯 명이다.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세 남성이 한 여성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기울어가는 나라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내 눈길을 확 사로잡은 것은 두 여성 주인공이었다. 곱디고운 한복 맵시로 후원을 산책하다가, 검은 코트 휘날리며 지붕 위를 날아다니고 총을 들어 역적과 일본 침략군을 응징하는 양반집 애기씨 의병 고애신, 그리고 영, 불, 일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총칼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위기마다 개입하여 호텔 일꾼부터 황제 폐하까지 다 도와주고 움직이기도 하는 매력적인 지략가 빈관 사장 이양화다. 이 두 사람은 집안끼리는 서로 부모를 죽인 원한 관계가 있고 한때 한 남자를 둘 다 사모하기도 했으며 살아가는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서로를 존중하게 되고 결국 동지가 된다. 그들은 사랑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했지만, 그 사랑이 그들의 할 일이나 갈 길을 바꾸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 남성은 늘 고애신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며, 총을 맞고 칼을 맞고 파혼을 하고 목숨을 바친다. 기존의 드라마들과 남녀의 역할이 바뀌어 있다. 몇 회를 보다가 이런 드라마를 써내는 작가가 도대체 누구인가 찾아보니 김은숙이라는 작가였다. 역시 그랬다.

실제로 독립운동사에는 수많은 여성 의병이 있었고 그중에는 무장투쟁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료는 자금조달, 무기운반, 무장투쟁, 의식주 해결에 그들의 활약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그 활약의 비중만큼 역사서술에 공정하게 남겨져 있지는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그 점에서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고애신이 만주에서 독립군 훈련대장으로 활약하는 장쾌한 장면은 상상 속에서 평등을 구현해 낸다고 하겠다.

역사 속에 있었으나 남성중심의 역사서술이 묻어버린 여성들의 다양한 역할과 성취를 여성들이 글쓰기로 살려내고 있다. 상황과 신분과 역할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많은 인물들을 그려낸 훌륭한 여성 작가들에게 존경을 바친다. 자기 이야기,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여성들이 많아질수록 여성의 자유는 늘고 용기는 자란다. 작가가 아니라도 괜찮다. 조선시대 어느 양반집 부인의 급진적인 일기, 시골 주민센터 시쓰기 교실 할머니들의 소박하고 해학 넘치는 시, 햄버거집 밤샘 알바하는 젊은 여성의 진솔한 수기에 모두 감동이 있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이야기를 정직하게 써놓으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어 부족한 글이나마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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