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속으로]

'몸 이야기'로 그린 여성들의 아픈 삶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s)'는 이제 고전이다. '질(膣)의 독백'이라는 기이한 제목을 가진 이 연극이 이브 엔슬러(Eve Ensler)의 1인극으로 미국 뉴욕의 한 소극장에서 초연된 것은 1996년. 그 후 '몸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 삶의 아픔을 전한 이 도발적 연극은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제작됐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버전으로 지금까지 꾸준히 무대 위에 올려지고 있다. 현재는 중견인 서주희나 장영남 배우는 오래전 이 작품에 출연해 어린아이에서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로 변신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입증했던 연기자들이다.

초연 이래 20여 년의 시간 흐름 속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극심한 편견은 얼마나 줄어들었을까. 국내의 경우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여태껏 제작되고, 유사한 주제의 다른 작품이 계속 선보이며 공감을 얻고 있는 걸 보면 상황이 그간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듯하다. 최근 공연된 극단 몸소리말조아라 제작의 '목욕합시다'(10월 11~14일, 문래예술공장)와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9월 13~23일, 대학로 혜화동1번지), 이 두 편의 연극은 그러한 현실을 웅변하는 대표적 사례다.

 

진도 씻김굿의 형식을 빌어 여성 삶의 아픔을 그린 조아라의 1인극 목욕합시다의 한 장면. 사진_최용석
진도 씻김굿의 형식을 빌어 여성 삶의 아픔을 그린 조아라의 1인극 '목욕합시다'의 한 장면. 사진_최용석

 

몸 이야기를 통해 강압에 의해 성노리개가 된 여성들의 아픔을 그린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 중 한 장면. 사진_강일중
'몸 이야기'를 통해 강압에 의해 성노리개가 된 여성들의 아픔을 그린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 중 한 장면. 사진_강일중

조아라 배우의 1인극인 '목욕합시다'는 '몸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분노와 고통을 애절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장구 등 타악기와 건반악기의 생연주가 있는 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형식상 특징은 진도 씻김굿의 순서에 따라 극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극장의 한쪽 벽면에는 넋전 이미지를 딴 여성의 얼굴 그림이 80개 가까이 붙어 있다. 조아라의 극중 역할은 무녀(巫女). 원래 씻김굿은 무당이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지만 이 극에서는 폭력과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아픔을 씻어낸다.

 

진도 씻김굿의 형식을 빌어 여성 삶의 아픔을 그린 조아라의 1인극 목욕합시다의 한 장면. 사진_최용석
진도 씻김굿의 형식을 빌어 여성 삶의 아픔을 그린 조아라의 1인극 '목욕합시다'의 한 장면. 사진_최용석

 

진도 씻김굿의 형식을 빌어 여성 삶의 아픔을 그린 조아라의 1인극 목욕합시다의 한 장면. 사진_최용석
진도 씻김굿의 형식을 빌어 여성 삶의 아픔을 그린 조아라의 1인극 '목욕합시다'의 한 장면. 사진_최용석

작품 준비과정에서 조아라를 비롯한 제작팀은 다양한 연령대의 80명이 넘는 여성들을 인터뷰했으며 그들로부터 전해 들은 삶의 이야기를 애잔함이 있는 춤과 퍼포먼스, 소리와 내레이션으로 풀어냈다. 사회 통념상의 미모 기준에 짜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성, 성폭력 피해자, 낙태 여성, 성전환자 등의 몸 이야기가 퍼포먼스로 전개된다. 체중계와 콘돔, 자위 기구, 붉은 끈 등은 중요한 오브제들이다.

관객이 극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연출 또한 흥미롭다. 관객은 흡사 재래식 공중목욕탕에 입장하듯 극장으로 들어서게 되며, 종종 진행자의 요청에 따라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 등 폭력피해자들의 악몽 같은 얘기를 담은 노트를 함께 읽기도 한다. 후반부의 길닦음 장면에서는 전 관객이 길베를 양쪽에서 함께 펼쳐 들어 영돈을 이동시키기도 하고 조아라가 길베를 가르는 동작을 돕기도 한다.

'공주들'은 '예쁜'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마다 각기 다른 지배논리와 상황논리에 따라 일본군, 국군, 미군을 위해 몸을 내어주고, 외화벌이의 전선에 서야 했던 '공주들'의 참담한 모습을 그린다.

 

몸 이야기를 통해 강압에 의해 성노리개가 된 여성들의 아픔을 그린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 중 한 장면. 사진_강일중
'몸 이야기'를 통해 강압에 의해 성노리개가 된 여성들의 아픔을 그린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 중 한 장면. 사진_강일중

 

몸 이야기를 통해 강압에 의해 성노리개가 된 여성들의 아픔을 그린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 중 한 장면. 사진_강일중
'몸 이야기'를 통해 강압에 의해 성노리개가 된 여성들의 아픔을 그린 극단 신세계의 '공주들' 중 한 장면. 사진_강일중

이 연극의 구성과 무대화를 맡은 김수정은 관객을 몹시 불편하게 하는 장면을 거리낌 없이 만들어내는 도발적인 연출가다. 관객을 편치 못한 상황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현실을 직시하고 깨어있도록 하자는 의도다. '공주들'에서도 '양공주', '왜공주', '관광기생'들이 당했던 수난의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제목의 '공'은 '公'이 아니라 구멍을 뜻하는 '孔'자다. 작품의 여러 곳에서 몸에 있는 '구멍'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 '질'이라는 단어가 대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품은 '공주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에서 '국익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여성이 무서운 폭력에 시달리며 몸과 정신이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 작품과 '목욕합시다'에 여럿의 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건 매우 흥미롭다. 그중 하나는 여성들의 주체적 인식을 표현한 부분이다. '공주들'에는 폭력의 희생물이 되어 왔던 공주들이 몸에 있는 '구멍'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의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시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목욕합시다'에서 조아라는 낙태한 여성의 아픔을 대변하는 소리에서 "…여성의 몸은 공공재가 아니다. 이 자궁은 나의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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