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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랜마'의 릴리 톰린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낙태를 위해 600달러가 필요하다는 손녀, 세이지(줄리아 가너 분)와 그의 할머니 엘(릴리 톰린 분)이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린 영화 <그랜마>(2015, 폴 웨이츠 감독)는 할머니와 손녀의 버디무비이다.
한때 유명한 시인이었지만 지금은 실직한 레즈비언 교수 엘 리드. 막 모든 부채를 청산한 데다가 신용카드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될 뿐이라는 신념 때문에 잘게 잘라 모빌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가난한 시인이었는데 마침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고작 43달러에 불과하다. 임신을 했고, 이 임신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십대 손녀 세이지에게 엘은 충분히 생각한 것인지만을 묻는다. 당장 오늘 오후에 수술을 예약해 두었다는 세이지의 말에 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또 세이지의 선택에 어떤 판단과 책망도 하지 않고 돈을 구하러 나선다.
그 길에서 세이지와 관계를 맺은 그 남자를 비롯해 엘과 과거의 시간을 공유한 남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내 아이가 맞냐?”며 흔해 빠진 클리셰를 재현하거나 과거의 상처에 갇혀 여성을 증오하고 자기를 연민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돈을 구한 엘과 세이지. 혹시라도 전형적인 영화처럼 생명이 소중함이 어쩌고 하며 결심을 바꾸면 어쩌나 하는 걱정했다. 하지만 세이지를 맞이하는 것은 압박을 받고 있거나 절차가 두려울 수 있으니 짧은 상담을 하자는 여성 상담사다. 자신의 낙태 경험을 이야기하며 손녀가 아플지, 슬플지 묻는 엘에게 여성 의사는 몸은 아프지 않을 것이며 몸의 주인인 세이지가 하는 결정을 통해 마음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중세시대가 아닌 시대’라 말한다. 영화는 낙태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성소수자와 페미니즘, 나이 듬에 대한 가벼울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깜찍하게.
특히 주인공 엘 역을 맡은 배우 릴리 톰린은 그 자신을 연기한 것처럼 자연스럽다.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이며 여성인 애인과 결혼한 그는 동물복지, 시민권, 여성문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LGBTQ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있다. 연기 잘 하는 노년(그는 1939년생이다)의 여성배우이자 활동가이기도 한 그의 삶을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는 듯 하다. “나는 왜 누군가가 그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내가 바로 그 누군가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는 그의 말은 그가 사는 삶의 태도를 대변한다. 릴리 같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 자매들과 더불어 나 스스로 행동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로등 밝은 밤 길을 걸어가는 엘의 뒷모습을 잡은 롱테이크 샷을 통해 하루동안 그가 만난 뭇남성들과는 상관없이 걷는 우리들의 길을 보여준다. 우리는 원남성이나 국가와는 상관없이 원래 가려던 갈 길을 마저 다 갈 것이다. 나의 몸에 대한 권리는 나에게 있고, 한 순간도 국가나 남성에게 이 권리를 이임한 적 없다는 깃발을 들고.
문환이. 자유 기고가 moon@wooha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