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가르치는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바라볼 수 없는 인격의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책이 있다. 먼저 배우고 아는 사람으로서 가르친다는 일반적 의미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요구와 욕구를 중심으로 한 관계 형성에 익숙해져 있는 남성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르치는 남자의 극단적 전형’을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았다. 최근 성폭력 가해 관련 재판에서 비슷한 사례를 놓고서도 엇갈린 사법적 판결이 있었지만, 판결의 다름과 관계없이 ‘가르치는 남자의 전형적 모습’은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 남자들의 ‘가르침’은 어떤 특성을 보이는가?

첫째, 상대와의 상호작용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일방적으로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형태만을 갖는다. 내가 중심이 되어 나의 가치와 생각, 욕구를 요구로서 표현할 뿐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성찰적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재판을 받는 성폭력 가해 용의자든 판결을 하는 남성 판사든 가릴 것 없이 피해여성이 권력의 힘에 굴복해 하게 된 반응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지 않다. 사오라고 시킨 물건을 문 밖에 놔두고 문자로 알려줬으면 될 것 아니냐는 반응이 그래서 가능하다.

둘째,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없다 보니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가르침의 상대는 인격체로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주체적 모습을 역사적 과정에서 지워버렸다. 여성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 남성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존재’일 뿐이다. 동등한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서 여성의 존재를 볼 수 없음이 ‘가르침’의 특징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라진 존재로서 여성을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이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를 통해 이미 1960년대 초반에 드러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가르치는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여전히 바라볼 수 없는 인격의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

동등한 파트너로서 상대방을 부인하는 기제를 통해 남성은 여성을 통제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통제가 ‘가르침’의 세 번째 특징이다. 여성을 ‘가르쳐서 내 말, 내 욕구, 내가 만든 규범과 가치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삶이 남성에게는 자연스럽다.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규범의 통제에 여성도 익숙해져 있다. 수천 년에 걸친 가부장제적 역사에서 이러한 통제 기제는 숨 쉬는 공기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진정 평등한 사회에서 살기 원한다면, 남성적·가부장적 가르침이 얼마나 반동적 가치와 규범에 기초한 것인지 첫눈에 알아보기 어렵다. 불평등한 남성적·여성적 역할에 대해 아직도 대다수가 문제제기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음은 이러한 ‘가르침’의 결과이기도 하다.

넷째, 그래서, 누군가 ‘가르침’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불편한 상황이 발생한다. 명절날 큰집에 모여 여자들은 음식 장만하며 나르고 남자들은 앉아서 술 마시는 ‘자연스러움’에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모두가 불편해진다. 그러나 이번 추석에도 여전히 그런 역할 구도가 많은 집에서 바뀌지 않았다 할지라도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담은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다. 더 이상 ‘가르침’에 따르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가르침의 주체로서 나도 나서겠다는 페미니즘의 주장을 이제 더 이상 억누를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다.

지금까지 나를 가르쳐온 가부장제의 규범과 가치와 관련해 여성과 남성 모두 문제제기를 하고 ‘가르침’을 거부할 때이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마셔왔던 ‘가르침’이라는 공기가 사실은 미세먼지를 대량 포함한 유해물질로서 성희롱·성폭행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 자체가 진보다. 변화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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