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 엄마 성 물려주려면 

혼인신고 할 때 결정해야

‘호주제’는 사라졌지만

아버지의 성 우선 따르는

‘부성주의원칙’은 그대로

CEDAW 수차례 폐지 권고

 

지난 6일 전북 전주시의 한 결혼식장에 걸린 현수막에 ‘자녀가 엄마 성(姓) 따는 앞서가는 혼인잔치’라고 적혀 있다.
지난 6일 전북 전주시의 한 결혼식장에 걸린 현수막에 ‘자녀가 엄마 성(姓) 따는 앞서가는 혼인잔치’라고 적혀 있다.

자녀가 우선적으로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정한 민법상 781조의 ‘부성주의원칙’에 반기를 드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국민 10명 중 6명도 아버지의 성만을 원칙적으로 따라야 하는 부성주의원칙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정상가족’ 이념이 공고한 현실에선 자녀에게 어머니의 성을 물려주려는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남편은 물론 ‘시가’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거나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자녀는 ‘비정상 가족’이라는 차별적 낙인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자녀가 엄마 성(姓) 따는 앞서가는 혼인잔치”

10월 6일 오후 3시 전북 전주시에 위치한 한 결혼식장 앞과 웨딩홀 안에는 이런 내용의 현수막이 걸렸다. 5년 연애 끝에 이날 결혼한 신부 A(28)씨가 어머니 B(68)씨와 함께 준비한 것이다. 신부 A씨는 예비 신랑과 상의 끝에 앞으로 태어날 자녀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기로 했다. A씨는 “여성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녀가 당연하게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관습일 비판하고 호주제 폐지 뒤 자녀에게 어머니의 성을 줄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A씨의 결혼식은 신랑 측 부모 자리는 물론 신부 아버지의 자리마저 텅 빈채로 진행됐다.

A씨에 따르면 시부모는 A씨에게 “손주가 엄마 성을 따르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참석하지 않았고, 친정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신부는 이날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팝송 ‘나의 어머니’(Mother of mine)에 맞춰 식장에 입장했다. A씨는 “혼인신고까진 순조로웠지만, 신랑이 자녀의 성을 제 성을 따르기로 한 것을 시부모님께 말씀 드리면서 다툼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시부모님께 설명했지만, ‘연을 끊겠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 같다”고 했다.

신부 어머니 B씨는 “곁에서 힘들어하는 딸을 지켜보며 ‘시부모가 원하는대로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딸에게 권하기도 했지만, 자식에게 엄마 성 주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며 “이번 결혼 준비를 하면서 엄마 성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이렇게 어렵고 이해받기 힘든 일이란 걸 뼈져리게 느꼈다. 법보다 무서운 게 관습 같다”고 토로했다.

민법 제781조 제1항에는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돼 있다. 즉, 부성주의원칙 또는 부성우선원칙이다. 다만 ‘부모가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고 선택 조항을 넣어 여지를 뒀다.

자녀에게 어머니의 성을 물려주려면 ‘혼인신고 시’ 미리 결정해야 한다. 혼인신고서 4항에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아니오로 답해야 한다. 여기서 ‘예’를 선택해야 아이 성씨를 어머니의 성으로 따를 수 있다. 절차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따로 ‘부와 모 사이에서 태어날 모든 자녀의 성과 본을 모의 성과 본으로 정하기로 협의합니다’라는 내용의 협의서와 주민등록증 사본을 제출해야 절차는 끝이 난다. 만일 부부 중 한 사람이 출석하지 않은 경우에는 인감증명서와 서명에 대한 공증서까지 내야 한다.

부성주의원칙은 호주제의 잔재다. 2005년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7대 1 의견으로 과거 민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민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호주제는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 헌재는 부성주의원칙 자체는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서양의 많은 문화권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부성주의는 규범으로서 존재하기 이전부터 생활양식으로 존재해 온 사회문화적 현상이었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은 여전히 부성주의를 자연스러운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당시 유일한 여성인 전효숙 재판관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아버지 성을 강요하는 부성주의는 오늘날 생활양식에 비춰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고 양성평등의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자녀의 성 결정에서 모·부와 여·남을 합법적으로 차별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잇따랐지만, 여전히 부성주의원칙은 그대로다. 이성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가족’뿐 아니라 별거가족·동거가족·동성애 가구·1인 가구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늘어난 현실에서 부성주의원칙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10~70대 3303명을 대상으로 한 ‘자녀의 성 결정제도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연구’ 결과, 응답자의 67.6%(2234명)는 ‘부성주의 원칙은 불합리하다’고 응답했다. 이는 지난 2013년 조사 때보다 5.7%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부성주의 원칙은 당연하다’는 응답은 32.4%로 2013년(38.1%) 보다 5.7%포인트 줄었다. ‘부성주의 원칙은 불합리하다’고 답한 응답자(2234명)에게 자녀의 성 결정 방법에 대한 대체방안을 물은 결과, 자녀의 성은 ‘부모가 협의해 선택한다’고 한 응답이 71.6%로 가장 많았다.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CEDAW)도 가족성에 대해 부부가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1984년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을 비준했지만 14년째 가족성에 관한 규정인 제16조 제1항 g호를 ‘유보(reservation)’하며 이행 의무를 저버렸다.

부성주의원칙에 근거한 자녀 성 결정제도를 달라진 국민 의식을 반영하고 국제사회에서 권고에 따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차 힘이 실리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8월 제3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16∼2020) 보완계획을 통해 자녀의 성·본 결정 협의 시점을 현행 혼인신고 시에서 자녀출생 시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자녀의 성을 결정하는 시점을 아이가 태어나는 때로 바꿔 선택권을 넓히겠다는 계획이다. 반갑지만 아직 부족하다.

조경애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법률구조1부장은 “현행 부성주의원칙은 강제가 아닌 부부 합의에 의해 자녀 성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여, 과거 부성강제주의보다 완화된 듯 보인다”며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정상’으로 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부성주의원칙을 규정한 민법 제781조 제1항을 허물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며 “중국은 이미 40년 전에 부성주의원칙을 없앴고, 일본은 1947년 헌법 시행과 함께 폐지했다. 이제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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