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판 위 구석 난간에 기대어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년이 있다. 소년의 부모가 다가와 묻는다.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니?” “아뇨.” “그래? 그럼 우린 저 쪽에 있을 테니까 생각이 바뀌면 오렴.” “네.”

미국영화 <스플래쉬>의 한 장면이다. 영화에선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장면이지만 만약 한국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파티에 참석하려는 부모가 대여섯살 된 아이에게 ‘같이 갈 것인지’ 묻고 아이가 싫다고 했을 때 그 의사를 그대로 존중해주는 예를 찾는다는 것이 우리에겐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아기에게도 ‘인격’이란 게 있다

직장여성인 딸을 위해 갓 돌 지난 손녀를 돌보고 있는 ㅇ씨는 “젊은 부모들이 오히려 자식을 막 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자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ㅇ씨는 “아기가 소리를 지르거나 울 때 왜 불편해하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무조건 짜증을 내고 윽박지르는 것은 말 못하는 아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ㅎ씨도 “아이들을 존중해주라는 건 잘못을 해도 눈감아주라는 얘기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아듣도록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 몇 국가에서는 어른이 아이의 의견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아이와 관련된 일을 결정하는 행위도 엄연한 차별로 범법행위가 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선 자식이 성인이 되어 진로를 결정할 때, 거취를 정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조차 부모의 의지가 우선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이 어린 사람들의 결정권에 대해선 아예 그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다.

“우리 어릴 적을 생각해 봐요. 어른들이 한 얘기들, 그 시절 겪었던 일들 다 기억하고 있지 않나요? 그 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었죠. 당연히 어린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삶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라도.” (전직 초등학교 교사 ㅇ씨)

학생들의 눈높이로 ‘…합니다’ 써야

“자, 여기를 보세요.”

초등학교에선 대부분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존댓말을 쓴다.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ㄱ씨는 “존칭을 쓰도록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에게 교육상 반말을 쓰는 건 좋지 않다고들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교사에게 반말을 듣게 되는 횟수가 는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씨는 “‘…했어요’ ‘…합니다’로 공부하던 학생들이 갑자기 ‘…해라’로 말하는 교사를 만나게 되면 그 정서가 불안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씨는 “원칙도 없이 교사가 학생들에게 제멋대로 말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교육이 가장 기본이 되고 상식이 되어 있는 문제조차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비판해왔다.

“학생들 앞에서 ‘합니다’ ‘하세요’를 쓰느냐 ‘한다’ ‘해라’를 쓰느냐에 따라 교사의 인격과 신념이 거기에 매이게 되고 교육방법과 효과까지도 말의 형식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합니다’ ‘해요’로 말하는 교사는 학생들의 인격을 높여주고 학생들의 눈과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면서 가르치게 되며 반대로 ‘한다’ ‘해라’로 가르치는 교사는 지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로 수업을 하고 학생들의 삶과 마음을 살피지 못한다.” (교육개혁위원회에 제출한 이오덕씨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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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떻게 생각해요?’

초등학교 수업시간엔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 교사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존칭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학생들의 인격과 눈 높이를 존중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존댓말 쓰면 부부싸움을 할 수가 없죠”

“비디오 보다가 너무 웃겼던 건 두 주인공이 같이 자고 나더니 그 때부터 남자가 여자한테 반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자는 그대로 존댓말을 하구요. 그런 식으로 외화를 번역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 걸요.” (대학생 ㅁ씨)

우리 사회의 성별 권력 차는 곧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서로 존칭을 쓰던 두 남녀가 가까워지면 남성은 ‘자연스럽게’ 말을 낮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엔 동생처럼 여기며 반말을 쓰다가도 어느 순간 여성 쪽에서 말을 높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남편은 항상 반말을 쓰니까 둘이 얘기할 때 늘 나는 ‘어린 사람’ 취급을 받게 되요. 나이는 세 살 차이가 나지만 같이 늙어 가는 처지잖아요? 그런데 내가 뭔가 의견을 제시해도 남편의 의견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그런 느낌이 드니까 좀 억울하죠.”(주부 ㄱ씨)

연애시절엔 반말을 쓰다가 결혼과 동시에 서로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는 ㅅ씨는 “부부간에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는데 가까워졌다고 함부로 대하게 될까봐”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ㅅ씨는 그 효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이 교육상에도 좋지만 무엇보다 내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건 다툼이 있을 때예요. 우린 오래 싸울 수가 없어요. 존댓말로 싸우다보면 웃기거든요.(웃음)”

상대를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는다

“전화 한 통화로 친구네 집 식구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았어요.”

프리랜서 ㅂ씨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친구의 동생과 통화를 하게 됐다. “동생이긴 하지만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겐 존댓말을 쓰거든요. 그래서 ‘00 동생인가요? 00 있으면 바꿔주세요’라고 했는데 그 몇 마디가 친구의 동생에겐 무척이나 기분 좋게 들렸나봐요.”

ㅂ씨는 다음날 친구로부터 “내 동생이 너 되게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식구들한테 칭찬하더라”는 말을 듣고 말 한 마디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사람이 제일 내세울 게 없을 때 ‘나이’ 들먹이면서 반말부터 하고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다고 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무시당하면 기분만 나쁘죠. 예전에 버스에서 만났던 아주머니가 ‘학생, 벨 좀 눌러줄래요?’라고 부탁했을 때 그 분이 더 어른답게 느껴졌어요.”(고등학교 2년생 ㅎ씨)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인데 우리사회가 평등사회로 나아가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너무 크다. “전화를 받을 때 누구나 ‘여보세요’라고 말하듯이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똑같이 두루 쓰는 말이 있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민주사회에서는 평등한 언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어야 한다.”(이오덕씨))

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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