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장애인 최옥란씨의 힘겨운 겨울나기

“‘당신도 이 돈으로 살아보고 답장 달라’는 쪽지와 함께 최저생계비로 받은 28만원을 봉투에 담아 보건복지부장관 집 문틈에 넣고 왔지요. 열흘쯤 뒤 경찰서에서 유실물이라면서 그 봉투를 가져왔대요. 답장은 없었고. 몸이 불편해 다시 집까지 찾아가기는 어렵고 1000원 짜리로 바꿔 등기로 부치려고요.”

국민기초생활보장제에 따른 최저생계비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생계비를 반납한 최옥란(36)씨는 뇌성마비 1급 중증장애인이다. 그는 현재 파주에 사는 어머니가 부쳐주는 20만원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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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장애인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최옥란씨는 자신의 작은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버틴다고 전한다.

“노점 포기하고 수급받았는데 약값도 안돼”

“얼마 전 장애인이동권과 관련한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들이 오른쪽 팔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인대가 늘어났어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밥 먹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말래요. 아파서 움직일 수도 없지만… 정말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번 해요.”

얼마 전까지 최씨는 청계천 8가에서 노점을 했다. 좌판을 벌이고 키토산 치약을 팔았는데, 벌이가 꽤 괜찮았다. 단골도 생겨 많이 파는 날은 하루에 50개 이상을 팔기도 했다. 이런 정도로 한달 꾸준히 벌면 60만원 이상은 벌 수 있으리란 생각에 최씨는 잠시나마 꿈에 부풀었었다. 그러나 중증장애인인 최씨는 눈이나 비가 오는 날, 몸이 아프거나 많이 춥고 더운 날은 좌판을 벌이지 못해 실제로 장사를 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열흘 남짓이었다. 이 노점 자리를 따기 위해 경찰과 싸우느라 최씨는 그동안 전과 5범이 됐다.

그러다 최씨가 사는 광명시 관할구청에 ‘벌이가 있는 사람이 수급을 받는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구청 담당자는 “노점과 수급 중 양자택일하라”고 최씨에게 요구했다. 고민 끝에 최씨는 ‘노점을 하지 않겠다’는 포기각서를 쓰고 수급을 택했다.

“생계비 28만원 중 영구임대아파트 관리비 16만원을 빼고나면 12만원 남아요. 목디스크 때문에 먹어야 할 약값만도 매달 13만3000원인데, 의료급여는 2만원밖에 안돼요. 최소한 쌀이라도 살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최씨는 최저생계비를 반납했다. 하지만 구청측은 수급을 포기하려면 영구임대아파트도 비워달라고 해 최씨는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생계비가 너무 낮게 책정된 것도 문제지만 그거라도 다 주면 괜찮죠. 추정소득이라고 실제 버는 돈과 상관없이 얼마를 벌 것이다 미리 잡아놓고 그 돈을 빼고 주는 거예요. 아는 언니가 화장품 방문판매하면서 기껏해야 하루 한두 개 팔아 만원이나 벌까말까 하는데 추정소득을 정해놓고 4식구에 8만원을 주는 거예요. 2∼3일이라도 실제로 따라다니면서 소득을 매기면 말도 안하겠어요. 나는 소득이 없는데 정부는 소득이 있다고 하니 기가 막혀 말도 안나와요. 후원금으로 받는 돈도 소득으로 쳐서 그만큼 제하고 주기 때문에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죠.”

최씨는 현행 국민기초생활법이 이처럼 ‘추정소득’ 뿐 아니라 추가지출이 많은 장애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수급권자에게 의료보호비가 제공되고 있지만 여전히 본인부담금이 50%이다. 그나마 비급여 항목이 많아 수급자가 모두 부담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뇌성마비가 진행되는 그는 마비를 늦추기 위해 최소한 1년에 두 차례 혈관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1병에 40만원이라 엄두도 못내고 있다.

생계비 28만원중 영구임대아파트

관리비 16만원 빼면 12만원 남아

약값만 매달 13만3000원인데

의료급여는 2만원 밖에 안돼요

최소한 쌀이라도 살 돈이

있어야 먹고 살것 아닙니까

“아이랑 함께 살고 싶었는데…”

지난 10일 ‘보건복지부장관이 공고한 기초생활보장 최저생계비가 장애인이나 취학아동 등 추가 지출요인이 있는 가구의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헌확인소송을 제기한 최씨는 요즘 노점을 못하게 한 국가를 상대로 위헌소송을 준비중이다.

최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서라도 돈을 벌려는 것은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다. 남편의 외도로 1999년 이혼하면서 최씨는 아이의 양육권을 남편에게 넘겼다. 장애 정도가 심한 자신보다는 같은 장애인이지만 대학을 졸업해 번듯한 직업이 있는 남편 밑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를 위해 더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어쩌다 애가 한번 찾아오면 울면서 가려고 하질 않아요. 그리고 엄마랑 살고 싶다고 어찌나 매달리는지. 처음에는 타일렀죠. 엄마는 돈도 없고 아파서 너를 보살펴주기 어렵다고. 그래도 애가 떨어지질 않으려고 해요. 자꾸 엄마랑 살고 싶다고... 그나마 애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살겠는데, 요즘엔 통 애를 보내지도 않아요. 그래서 결심했죠. 소송을 해서라도 애를 데려와 내 힘으로 키워보겠다고. 노점을 할 때만 해도 그 꿈이 실현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물거품이 됐죠. 수급 받는 대신 내 꿈을 포기했으니 이제 생계비 안받을테니 내 꿈을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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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기초생활보장제와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공부하면서 평범하던 최옥란씨는 싸움꾼이 됐다. <사진·민원기 기자>

“없는 사람도 인간답게 살수 있는 세상되길”

미군기지가 있는 파주에서 혼외 자녀로 태어난 최씨는 전에는 장애 정도가 5급으로 별로 심하지 않아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갔다. 형편상 중퇴를 하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최씨는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고부터 증세가 악화돼 현재는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집밖에 나갈 때는 서울역 부근에서 노래방을 하는 사촌오빠가 차로 데리러 온다.

최씨는 작년에 병원의 어처구니 없는 오진으로 중절수술을 받았다.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손목이 저려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을 당시 최씨는 임신 중이었지만 최씨는 이 사실을 몰랐다. 배가 불러오고 자꾸 구역질을 하는 최씨를 네 명의 의사가 진찰하고 ‘장 유착’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최씨는 퇴원 후 시위 현장에 나갔다가 경찰들과 충돌해 병원에 실려갔을 때 임신사실을 처음 알았다.

“병원에서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성관계도 없을 것이라 단정짓고 수술을 하면서도 그 흔한 소변검사 한번 하지 않은 거예요. 장애인이라고 사람 취급도 안한 거죠.”

임신 중인 아이가 수술로 인한 약물투여 등으로 기형일 확률이 높아 6개월째에 중절수술을 한 최씨는 현재 병원측에 의료과실 책임을 묻고 있지만 병원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몸도 형편도 최악의 상태이지만 최씨는 현재 장애인 창업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단다.

“내 인생만 생각하면 하루에도 열두번 차에 뛰어들고 싶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이 문제는 나 혼자만 겪는 게 아니라 수급자 전체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팁니다. 이런 노력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제발 가진 것 없는 우리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최이부자 기자bjchoi@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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