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9일 스웨덴 영화계 여성 종사자 수백명이 스톡홀름의 소드라 극장에 모여 업계 내 성폭력과 괴롭힘 실태를 폭로했다. 해시태그 ‘#tystnadtagning(#침묵행동) 으로도 잘 알려진 연대 성명에는 스웨덴 여배우 703명이 서명했다. ⓒ유튜브 영상 캡처
2017년 11월 19일 스웨덴 영화계 여성 종사자 수백명이 스톡홀름의 소드라 극장에 모여 업계 내 성폭력과 괴롭힘 실태를 폭로했다. 해시태그 ‘#tystnadtagning(#침묵행동) 으로도 잘 알려진 연대 성명에는 스웨덴 여배우 703명이 서명했다. ⓒ유튜브 영상 캡처

한날한시 목소리 낸 여배우 500여명

가해자·피해자 익명 폭로

개인 아닌 구조 겨냥…고발자 안전 고려

정부·기관 즉각 대응 나서

스웨덴 차별금지법 작동 재점검

‘동의없는 성관계는 강간’ 재정의

동의 증명은 가해자 몫으로

성폭력의 안전지대는 없다. 세계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부’가 출범했던 ‘성평등 선진국’ 스웨덴에서도 최근 여성 수천 명이 말 못했던 성폭력 피해를 증언했다. 특히 여배우 약 500명이 한날한시에 공동 성명을 내고 단체로 폭로에 나서면서 큰 충격을 줬다. ‘진짜 문제는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구조’라는 여성들의 비판에 스웨덴 공연예술계는 즉각 자성하고 여러 대응책을 마련 실행하고 있다.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몹시 다른 전개다.

전 과정을 곁에서 목도하고 고발자들과 연대해온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이 한국을 찾았다.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에서 딜버 의장은 스웨덴의 미투 운동 전후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이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에서 스웨덴 사례를 들려주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이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에서 스웨덴 사례를 들려주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스웨덴 공연예술계에서도 성차별은 공기 같은 것이었다. “여성은 무대나 촬영장에서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남성이 더 재능있고, 재미있고, 진지하고, 천재적이라고 여겨진다. 남성중심적 시선으로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문화도 존재한다. 여성이 ‘매력적인 예술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남성보다 훨씬 짧다. 50세 이상의 여성에겐 엄마나 할머니 역할만 주어지기 일쑤다. 운이 좋다면 말이다. 여성은 틈새에 머무르거나 주류 기금을 받지 못했다. 대작은 남성들의 차지였고, 여성들은 주로 작은 무대에서 작은 극을 연출했다. 여성 관료들이 있어도 구조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성폭력은 암암리에 일어났다. “유명하고 인기 있는 남성 공연계 인사 가운데에는 “최선을 다해 피해야 할 남성들”이 있다. ‘그들을 피하려면 엘리베이터에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 되도록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는 게 여배우들 간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침묵했다. 업계에서 퇴출당하거나 골칫거리로 낙인찍힐까 두려워서였다. “우리는 프로듀서나 대표에게 알릴 수 없었다.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여성을 없애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남성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게 예술과 관객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침묵의 일부가 됐고, 우리만 좌절했다. (…)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에 살지만, 이런 가부장제 구조가 정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난 1월 22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웨덴 최대 영화제인 굴드바게 시상식(Guldbaggegalan) 날, 스웨덴 여배우들은 성폭력에 반대하는 의미로 검은 옷차림에 손을 맞잡고 입장했다. ⓒTV4 영상 캡처
지난 1월 22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웨덴 최대 영화제인 굴드바게 시상식(Guldbaggegalan) 날, 스웨덴 여배우들은 성폭력에 반대하는 의미로 검은 옷차림에 손을 맞잡고 입장했다. ⓒTV4 영상 캡처

이런 가운데 미국 할리우드에서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곧이어 스웨덴으로 번졌고, 각자의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던 여성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유명 배우들이 주축이 돼 페이스북 비밀 그룹을 만들었고, 배우들이 동료들을 초대해 여배우 500여 명이 모여 각자의 경험을 나눴다. 여성들은 따로따로 폭로하기보다 함께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여성이 직접 발언하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편이 “더 안전하고 덜 의심받을 수 있는 폭로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또 스웨덴 최대 일간지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Svenska Dagbladet)’의 여성 탐사 저널리스트와 협업해, 피해 증언과 연대 성명을 포함한 기사를 발표하기로 했다. 해시태그 ‘#tystnadtagning(#침묵행동) 으로도 잘 알려진 이 성명에 스웨덴 여배우 703명이 서명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 누미 라파스와 소피아 헬린 등 국제적 명성을 떨치는 배우들도 연대했다. 지난해 11월 8일 공개된 첫 폭로 보도는 말 그대로 스웨덴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어 수많은 여성들이 입을 열었다. 오페라 가수 700명, 변호사 6000명, 음악계에서 2000명 이상…. 약 65개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수천 명이 성폭력 피해를 고발했다.

여성들은 폭로 이후에도 서로를 도왔다. 딜버 의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에 대한 지원”이라고 했다. 한 여성이 주연을 맡은 영화의 상대역에 가해 남성이 캐스팅되자, 여성들은 단체로 문제를 제기해 결국 가해자 대신 다른 배우가 그 역을 맡게 했다. 여성 주연의 이름이 빠진 영화 포스터도 단체 문제 제기로 정정했다. 페이스북 비밀 그룹 대표들은 스웨덴 문화민주주의부 장관의 특별 고문이 돼 성희롱 성폭력 관련 법안 강화에 힘썼다.  

여성들은 가해자는 물론, 법률에 따라 성폭력 문제 해결 조처를 할 의무가 있는 경영진, 프로듀서, 연출들의 책임을 강하게 물었다. 스웨덴 차별금지법은 고용주에게 일터의 성평등을 확립할 책임이 있다고 명시한다. 일부 가해자들은 직장에서 퇴출당했다. 정치권과 경영인들은 합당한 개선책을 논의하고 실행해 나갔다. 스웨덴 예술인노조와 고용주 조직위원회는 지난 4월 개선책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고, 평등과 다양성을 위한 상호 협의회를 설립했다. 모든 공연예술기관은 모든 형태의 괴롭힘, 성폭력 관련 정책, 폭력 피해 시 대처 방안 등을 전면 재검토했다. 여러 단체들은 연습 첫날 관련 정책과 규범을 함께 큰 소리로 낭독한다고 한다. 지난 7월 1일부터 스웨덴에서는 명시적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이라고 재정의하는 내용의 ‘(FATTA)법’이 발효됐다. 성폭력 피해자가 성관계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면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가 묘사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동의를 얻었는지 설명하는 일은 가해자의 의무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 현장.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 현장.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남성의 성폭력 허용하는 구조가 최대의 적”

문제 인지하고 변화 촉구하는 남성들도

이 모든 게 ‘페미니스트들의 음모’라며 반발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고발자들이 역으로 공격받기도 했다. 가해자의 이름을 공개 거론하며 피해를 고발한 여성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유명 여배우들은 협박과 혐오 메일을 받았다. 계속되는 협박으로 페이스북 비밀 그룹을 폐쇄하고 새 그룹을 만들어야 했다. 

반면 피해고발자들을 지지하고, 문제 상황에 개입해 가해를 막지 못했던 것을 사과하고, 생존자들과 연대하며 연극영화계의 변화를 촉구하는 남성들도 있다. “많은 남성 동료들은 그들 자신이 문제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 그들이 가해자여서가 아니다. 그들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했거나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딜버 의장은 “남성들이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구조야말로 최대의 적이다. 구조가 바뀐다는 것은 우리 모두와 미래 세대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 현장.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연대의 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동력,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포럼 현장.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아직 갈 길 멀지만

스웨덴 미투운동 최대 성과는

원한다면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

아직 갈 길은 멀다. “제도권 밖 연극 단체, 소규모 제작사들은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으며 여전히 큰 문제에 처해 있다. (…) 그러나 우리의 미투 운동이 해낸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변화를 원한다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미투 운동에 동참한 피해고발자이자, 딜버 의장을 한국에 초청해 국제 연대의 디딤돌을 놓은 한국의 연출가이자 배우 박영희 씨는 말한다. “세계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우리가 누구와도 손잡을 이유가 생겼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대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낼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지치지 않고 싸우는 한 희망은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