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속으로]

어둡고 덩그런 무대 위에는 검은색 초대형 튜브가 흉물스럽게 놓여 있다. 가로 8m, 세로 5m의 크기의 엄청나게 큰 베개 같은 모양이다. 음산함을 자아내는 이 대형 오브제는 공연의 시작과 함께 누가 조종하는지도 모르게 혼자서 무대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다. 흡사 성서에 나오는 바닷속 괴물 레비아단 같다. 때로는 객석의 맨 앞줄 관객들을 향해 달려들기도 한다.

이렇게 초반에 위협적인 움직임과 함께 무대에서 어슬렁대던 검은 물체는 한순간 몸뚱이의 어디에선가 전라(全裸)의 무용수를 토해내듯 뱉어냈다 다시 급히 삼켜버린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물체의 자리이동이 지속하는 가운데 한동안 유사한 장면이 거듭 나타나고, 보였다가 사라지는 알몸 무용수의 숫자는 하나에서 둘 또는 세 명에서 6명까지로 늘어난다. 이런 가운데 극도의 불안·초조감, 고통, 그리고 공포와 죽음의 이미지가 무대를 가득 메웠다.

현대무용 '난파선-멸종생물 목록'(10월 1~2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의 장면들은 집채만 한 너울 한가운데에서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보트피플의 비참한 상황을 강렬한 이미지로 보여주는 듯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나타내는 조명과,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듯한 굉음이나 배의 기관 소리를 연상케 하는 음향 등은 긴박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의 한 장면. 무대에서는 초대형 검은색 튜브가 음산하고 위협적인 움직임 속에 알몸의 무용수들을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의 한 장면. 무대에서는 초대형 검은색 튜브가 음산하고 위협적인 움직임 속에 알몸의 무용수들을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Yana Lozena

이 작품은 현대무용 장르를 중심으로 국내외의 우수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약칭 시댄스)의 개막작이었다. 2018 시댄스(10월 1일~19일)의 중요한 특징은 올해로 21회째를 맞는 이 축제가 처음으로 하나의 주제를 내걸고 프로그램을 편성했다는 것이다. 첫 테마는 요즘 국제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난민’.

이번 ‘난민 특집’ 프로그램으로는 벨기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의 '난파선'을 비롯한 모두 8편이 공연됐거나 소개될 예정이다.

이 중 영국 프로틴 무용단의 ‘국경 이야기’는 국적이 서로 다른 무용수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겪는 배타성과 소외심리를 다뤘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 우리 모두 함께 떠안아야 할 숙제임을 암시하면서도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 작품이었다.

한국의 윤성은 안무가 만든 '부유하는 이들의 시'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난민들이 직접 참여해 완성된 작품. 새로운 삶을 찾아 낯선 땅에 발을 디뎠지만, 여전히 부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시와 영상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그려냈으며 '난민 사진가' 성남훈 작가가 제작진에 합류했다.

시리아 출신 미트칼 알즈가이르가 안무한 ‘추방’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건너온 그는 새로운 땅에서도 제대로 안정을 찾지 못한다. 작품은 난민의 실상을 중동의 민속춤 다브케를 통해 보여줬다.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의 한 장면. 무대에서는 초대형 검은색 튜브가 음산하고 위협적인 움직임 속에 무용수들을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본공연 때는 6명의 무용수 전원이 알몸으로 퍼포먼스를 하나 사진촬영을 위한 언론시연 공연 때는 출연진이 모두 옷을 입은 채 연기를 했다. ⓒ강일중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의 한 장면. 무대에서는 초대형 검은색 튜브가 음산하고 위협적인 움직임 속에 무용수들을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본공연 때는 6명의 무용수 전원이 알몸으로 퍼포먼스를 하나 사진촬영을 위한 언론시연 공연 때는 출연진이 모두 옷을 입은 채 연기를 했다. ⓒ강일중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의 한 장면. 무대에서는 초대형 검은색 튜브가 음산하고 위협적인 움직임 속에 무용수들을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본공연 때는 6명의 무용수 전원이 알몸으로 퍼포먼스를 하나 사진촬영을 위한 언론시연 공연 때는 출연진이 모두 옷을 입은 채 연기를 했다. ⓒ강일중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의 한 장면. 무대에서는 초대형 검은색 튜브가 음산하고 위협적인 움직임 속에 무용수들을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본공연 때는 6명의 무용수 전원이 알몸으로 퍼포먼스를 하나 사진촬영을 위한 언론시연 공연 때는 출연진이 모두 옷을 입은 채 연기를 했다. ⓒ강일중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의 한 장면. 무대에서는 초대형 검은색 튜브가 음산하고 위협적인 움직임 속에 무용수들을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본공연 때는 6명의 무용수 전원이 알몸으로 퍼포먼스를 하나 사진촬영을 위한 언론시연 공연 때는 출연진이 모두 옷을 입은 채 연기를 했다. ⓒ강일중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적 창작을 하는 최은희 안무와 프랑스 무용가 헤수스 이달고는 독일로 망명한 두 작곡가 윤이상과 피에르 불레즈를 통해 경계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망명’을 선보였다.

사실 모든 작품이 난민 문제를 작품 속에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무대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난파선’의 경우 무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관객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열린’ 주제의 작품이다. 보트피플을 연상할 수 있는가 하면 사회적 약자를 양산하고 집어삼키는 현대의 거대 자본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다. 작품은 대형 튜브가 바람이 빠진 채 무대 위에 남고 또 다른 튜브가 무대 오른쪽에서 나타나 왼쪽 밖으로 사라지는 가운데 무용수들이 무기력하게 그 뒤를 따르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아련한 아픔과 긴 여운을 남긴다.

한국은 최근 제주도의 예멘 난민 문제가 불거지면서 남의 일처럼 여겼던 국제사회의 핫이슈에서 우리가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실감하고 있다. 시댄스의 ‘난민 특집’ 프로그램은 예술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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