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연대체 ‘공동행동’·

익명 여성 모임 ‘비웨이브’

각각 서울 종로서 집회

칼자루 쥔 헌재·정부

형법 269조 폐지 미뤄 비판

여성들 “안전한 인공임신중절

받을 권리 국가가 보장해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9월29일 서울 중구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념 ‘269명이 만드는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9월29일 서울 중구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념 ‘269명이 만드는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신문] 서울 종로 일대가 ‘검은 물결’로 뒤덮혔다. 9월 29일 오후 12시부터 6시까지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은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 10월 시작된 한국판 ‘검은 시위’는 2년 째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날 각각 열린 집회는 이전 집회보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와 정부, 국회를 비판하는 강도가 높아졌다. 여성단체 활동가들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절박함을 드러냈다.

건강과대안, 한국여성민우회 등으로 구성된 여성단체 연대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는 이날 오후 1시20분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피켓 퍼포먼스를 펼쳤다. 검은 옷을 입은 시민 269명이 흰색 피켓으로 숫자 269 모양으로 자리를 잡자, 곧바로 붉은 천을 든 시민 20명이 200여명을 가로 질렀다. 붉은 천이 숫자 269 중간을 가르자, 여성들의 입에서 구호가 쏟아졌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 보장하라” “낙태죄를 폐지하라” “낙태죄는 위헌이다”

이번 퍼포먼스는 형법 269조 ‘낙태죄’ 폐지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마련했다. 이유림 공동행동 정책교육팀 활동가(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는 이번 퍼포먼스 진행 배경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선고를 다음 재판관들에게 넘기고 보건복지부는 최근 2016년 대대적인 반발에 부딪혔던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처리해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과 처벌을 강화하려 하한다”며 “이번 퍼포먼스는 낙태죄 위헌 판결을 미루지 말고 조속히 처리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퍼포먼스는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념하는 세계 각국의 행동 소식과 함께 전 세계에 공유될 예정이다. 이미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Repealthe269th #8A #AbortoLegal #SeráLey 등의 해시태그가 확산되고 있다.

 

‘269명이 만드는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 참가자가 바닥에 분필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글귀를 적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69명이 만드는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 참가자가 바닥에 분필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글귀를 적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형법 296조’ 삭제하라

한 활동가는 헌재와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정부의 메시지는 굉장히 분명한 것 같다. 여성들에게 살던 대로 살라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이어 “양심적 병역 거부 등을 보면 낙태죄 위헌 결정도 몇 년이 유보될 지 모른다”면서 “2012년 고3 여학생이 수능이 끝난 뒤 낙태 시술을 받으려다 끝내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의사가 시술 비용으로 요구한 금액이 350만원이다. 지금도 150만원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공동행동은 이날 “형법 제269조는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성에게 징역 1년, 벌금 200만원의 처벌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악법”이라 선언했다. 그러면서 “생명을 선별하고 책임을 방기해온 건 이 사회와 국가”이며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의 위헌결정과 폐지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 보장하라” “낙태죄는 위헌이다”“낙태죄를 폐지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번 퍼포먼스는 9월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Global Day Of Action for Access to Safe and Legal Abortion)을 맞아 열렸다. 18년 전인 2000년 9월28일 미국 식품의약국(FDA)는 인공임신중지 약물인 ‘미페프리스톤’, 이른바 ‘미프진’의 시중 판매를 승인했다. 전 세계 여성들은 이날 여성의 몸을 통제하며 건강과 삶을 위협하는 국가와 법·제도에 맞서 저항하고 연대한다. 폴란드는 10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폐기된 바 있다. 한국도 2016년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발표를 시점으로 낙태죄 폐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오후 2시부터는 보신각 앞에서 익명의 여성 모임 ‘비웨이브(BWAVE)’가 마련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촉구 집회가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날 오후 2시부터는 보신각 앞에서 익명의 여성 모임 ‘비웨이브(BWAVE)’가 마련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촉구 집회가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 대통령 탄핵 구호도

2016년까지 이제까지 수십 차례 집회가 열리고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청와대 국민청원에 23만명이 서명했지만, 아직도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정부는 2016년 대대적인 반발에 부딪혔던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기어이 처리해 낙태시술을 한 의사를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하도록 했다. 여성들과 산부인과 의사들이 반발하자, 보건복지부는 헌법재판소(이하 헌재) 판결이 나올 때까지 처분을 유예하겠다며 헌재에 바톤을 넘겼다. 그러나 정작 ‘칼자루’를 쥔 헌재는 5기 재판부의 퇴임 시기를 이유로 선고를 6기 재판부로 미룬 상태다. 헌재와 정부, 국회까지 여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집회에서 나오는 구호도 달라지는 분위기다.

“여성은 아기공장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애엄마는 처벌인데 애아빠는 어디갔냐” “애 아빠는 어디갔냐” “독박가사 독박육아 하다못해 독박처벌” “남자나 처벌하라”

공동행동의 퍼포먼스가 끝난 직후 약 300m 떨어진 보신각 앞에서 또 다른 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여성들이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날로 17번째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며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익명의 여성 모임 ‘비웨이브(BWAVE)’가 마련한 집회했다. 주최 측은 당초 800명으로 집회 신고를 했으나 두 배가 넘는 약 2000명(주최 측 추산)의 여성들이 참여했다. 참가자 상당수는 20대로, 이날 집회는 ‘불편한 용기’가 주최하는 불법촬영 규탄 집회와 마찬가지로 ‘여성’만으로 참가 대상을 제한했다. 집회 장소 주위로는 출입을 통제하는 펜스가 설치됐고 경찰이 펜스 주위에서 집회 참가자가 아닌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규제도 많았다. 개인 참가자의 언론 인터뷰를 막았고, 참가자들은 친목과 사담 나누는 것이 제한됐다. 집회가 땡볕 아래에서 4시간 넘게 이어지면서 주최 측은 참가자들이 지치지 않도록 물, 과자, 핫도그 등을 나눠주기도 했다. 

 

29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려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이 해바라기 씨(6주차 태아 크기)를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9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려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이 해바라기 씨(6주차 태아 크기)를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날 구호는 주최 측이 아닌 개인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선창했다. 참가자들은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하라” “생명이 소중하다고? 내가 그 생명이다” “세포 대신 여성인권이나 신경 써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낙태죄 폐지를 강력하게 규탄했다.

비웨이브는 “헌법재판소가 이번에 낙태죄 위헌 결정을 하지 않으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며 “위헌 결정이 나지 않을 경우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이 극심하게 침해될 것”이라고 외쳤다. 또 “지난 달에는 임신중단 수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이 시행됐고 이 개정안은 헌법재판소 결정 시까지 잠정적으로 적용이 보류된 상태”라고 비판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계란은 생명이 아니라는 취지에서 계란을 깨는 퍼포먼스, 6주 차 태아 크기와 같은 크기의 해바라기씨 던지기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집회 막바지에는 정부와 헌재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도 나왔다. 출연자들이 각각 ‘곰’(문재인 대통령의 성 ‘문’을 거꾸로 쓴 표현), ‘국회’, ‘헌재’라는 팻말을 달고 등장해 여성들의 ‘임신 중단권’을 빼앗았으나, 여성들이 함께 이들에게 ‘임신 중단권’을 되찾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짧은 퍼포먼스 였지만 지난 7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서 문 대통령을 의미하는 ‘곰’ 피켓이 나와 논란이 됐다. 이 표현은 극우 성향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에서 문 대통령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는 쓰인다고 알려졌다. 이날 집회에서는 “문 대통령 탄핵하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사임하라” 등 정부를 향한 비판 구호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2월 의사 A씨가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 중이다. ‘자기낙태죄’로 불리는 형법 269조 1항은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270조 1항은 임신한 여성의 동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임신중절을 해준 의사는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는 ‘동의낙태죄’ 조항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낙태죄 위헌 여부를 두고 공개변론을 열었지만 선고는 6기 재판부로 넘겼다. 선고는 당초 예상보다 늦어졌으나, 유남석 신임 헌법재판소장이 청문회에서 낙태죄 폐지 관련 헌법소원을 연내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한 만큼, 낙태죄 위헌 결정에 대한 기대는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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