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칼럼] 시골 할머니들에게 반했다
[정진경 칼럼] 시골 할머니들에게 반했다
  •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 승인 2018.09.29 00:09
  • 수정 2018-10-02 12: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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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밟고 상추 심으면서 살고 싶어서 시골살이를 간간이 해보고 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농촌으로 백 명 정도가 모여 사는 마을인데, 어디나 그렇듯 주민의 대부분이 노인이다. 환갑 즈음에 우리가 들어오자 비슷한 연배의 이장님은 “젊은 사람이 왔다”고 좋아했다. 노인회장은 칠십세 정도의 씩씩한 할머니인데, 젊고 일을 잘 해서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

동네를 다녀보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도 밭에서 일하는 사람도 거의 다 노인이고 그 중에도 대부분이 할머니다. 칠십대, 팔십대 나이에도 일을 하신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이십년 내로 우리 농업은 아예 문을 닫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가 아침 산책을 다니는 길은 바닷가 포도밭 사이로 뻗어있는데, 늘 우리보다 먼저 나와 포도밭을 가꾸는 할머니가 계시다. 자녀를 여럿 두셨는데 다 도시로 나가고 할아버지는 먼저 가시고, 몇백 평의 포도 농사를 혼자 지으신다. 자식들이 고생 그만 하시고 농사를 거두라 하지만, 그만 두면 뭐 하냐고 계속하신다. 그 땅을 팔면 여생을 호의호식 하고도 남겠지만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분이다. 포도 수확 철에 만나면 가져가 먹으라고 몇 송이를 따주신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탐스러운 포도를 받기는 하면서도, 초봄부터 폭염까지 노인의 노고가 들어간 포도를 그냥 얻어가기가 황송하다. 남편은 차마 못 받아 절절매고, 나는 주시는 대로 넙죽 잘 받는 편이다.

이삼년 전 8월 한밤에 폭우가 내린 날, 아침에 밭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노인 네 분이 모여 포도를 따 큰 통에 쓸어 담고 계셨다. 수확 철에 농익은 포도가 비에 젖어 터져서 상품가치가 없어져, 포도즙용으로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들인 품이 얼만데! 같이 속상해 어쩔 줄 모르는 우리에게 할머니가 태연히 말씀하셨다. “하늘이 하시는 일을 어째!” 자연에 기대어 수십 년 농사를 짓다 보면 필경 도사가 되는 것일까? 나로서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달관의 경지였다. 숙연했다. 팔 수 없으니 그냥 가져다 먹으라 하셨지만, 할머니네 포도가 제일 맛있어서 여기저기 보내줘야 한다고 우겨서 몇 상자를 사들고 왔다.

동네 할머니들에게 나는 반했다. 육십대로 보이는 철물점 주인 할머니는 나사못, 철망, 파이프,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전문가인데, 초보자에게 뭐든지 친절히 가르쳐 주신다. 이층집 할머니는 술과 노름으로 무던히 속을 썩였다는 남편이 먼저 가신 후, 혼자서 씩씩하게 농사를 지으며 사신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그 집 밭은 가뭄에도 싱싱하고 탐스러운 채소들이 줄을 맞추어 서있다. 우리 옆집 청각장애가 있는 할머니는 내 또래인데, 백발에 키가 크고 체격도 늠름하니 잘 생겼다. 어느 날 손수레에 실한 맷돌호박을 한가득 싣고 오기에 그 대단한 성과를 칭찬했더니 그 자리에서 세 개를 나누어 주셨다. 만날 때마다 양파 한 보따리, 게 찐 것 두어 마리 등 뭐라도 안겨주시니, 이렇게 얻어먹어도 되나 싶다. 내가 워낙 비실해 보여서 뭐라도 먹이고 싶은 것일까? 신세를 갚고 싶지만 우리 농산물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가끔 수퍼에서 사온 것을 들고 가는데 무안한 노릇이다.

우리의 농사를 떠받치고 있는 이 부지런하고 유능한 여성 농민들, 인심 좋고 넉넉한 시골 할머니들에게 어떻게 반하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도 성평등의식이 부족한 지역사회에서 그 분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하는지, 가족이나 사회가 그 분들을 그만큼 존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고하며 살아오신 이 할머니들이 부디 합당한 존경과 대우를 받고 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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